2008년 04월 10일
내 길을 간다
철학은 다 늙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젊은과학자에게 늙은 철학자들의 고민은 배부른 헛소리다. 젊을 때 과학을 하고 두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그 때 철학을 하고, 그 이후에 두뇌마져 작동하지 않으나 양심이라도 살아 있다면 정치를 하리라.
by 취어생 | 2008/04/10 21:29 | 트랙백 | 덧글(3)
2007년 12월 29일
마르크스의 통찰


"그러나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그리고 홉스에서 포이어바흐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철학자들을 움직여 온 것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순수사유의 힘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였다. 실제로 그들을 앞으로 밀고간 것은 주로 위력 있고 더욱 더 급속하고 급격한 자연과학과 산업의 발전이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II>강유원 옮김

그러나 이후 그들은 분명한 이 경험을 증오로 표출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되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응대하지 못한채 눈을 감고 스스로를 우물안에 가두기 시작하였다.
by 취어생 | 2007/12/29 00:40 | 일상사 | 트랙백 | 덧글(0)
2007년 12월 18일
입력후 출력대기 상태의 책들...
고민이다. 좋은 책들의 번역은 분명 늘어나고 있고, 그런 양서들의 수명은 줄어들어가는 듯 하고 (자기계발 서적과 소설과 아이들 동화책과 수험서의 시장독점으로 인하여..), 따라서 양서가 눈에 보였을때 바로 낙아채는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텐데도 조금 뒤쳐져 있었다는 느낌이다.

뒤늦게 변명하자면 나는 인문학자가 아니며 나에겐 하루종일 책을 읽으며 쓸 의무와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야간자율학습인 셈이다. "왜 과학자들은 책을 쓰지 않을까?". 불공평한 질문이다. 이는 마치 "왜 동양에선 과학이 발생하지 않았을까?"라는 철없는 질문과 유사하다. 어제 우리동네에 불이 났었다. 근데 왜 당신동네엔 불이 나지 않았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답이 있어야 정당성을 찾는다. 아니 적어도 답을 찾을 수 있는 합당성을 제시해줘야 한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나는 매우 합당한 답변을 찾는다. "왜 인문학자들은 그리도 많은 책을 쓰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인문학자들이 그리도 많은 책을 쓰기에 과학자들이 책을 많이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게다. 왜 그럴까? 어려운 답은 없다. "그것(글쓰기)"이 "그들(인문학자)"의 학문(인문학)이 행하는 "실험"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실험처럼 그들은 책을 읽고 비교하고 논문을 쓰고 저서를 출판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부족해 정치에 직접 동참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에게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일은 인문학자들이 정치에 뛰어드는 일과 비슷하다. 정치에 뛰어든 학자들은 존경받는가?

여전히 나의 글쓰기는 삼천포에서 멀지 않다. 이런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머릿속을 채우고 싶다. 위의 내 모든 말은 이런 나의 욕망을 게으름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

힐쉬베르거의 책을 왜 맨 마지막으로 두는가 하면, 내 삶이 끝날때까지 저 책을 읽을지 말지 끝까지 고민할 듯 보이기 때문이다. ㅎㅎ
by 취어생 | 2007/12/18 19:12 | 일상사 | 트랙백 | 덧글(0)
2007년 11월 27일
한국을 빛낸단다

인터뷰원문

한빛사에 소개된 논문

1.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

인터뷰 순서를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운이 닿아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동료, 선후배 과학자 분들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거창하게 대한민국의 과학정책이나 대학원생의 복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느 곳에서 느꼈던 작은 느낌 하나와 그 경험을 통해 얻어 전하고픈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작년 가을 CSHL (Coldspring Harbor Laboratory) Translational Control Meeting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CSHL은 모두가 잘 아시듯이 1년 내내 크고 작은 미팅이 열리는, 지금은 인종차별 발언으로 은퇴한 제임스 왓슨에 의해 설립된 연구소입니다. 보통 400~500명 내외의 같은 분야 종사자들이 모여 심도 있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팅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잘 짜여 있습니다. 심포지엄 시간이야 한국의 학회와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다시금 열정을 불태우고 재도약을 할 수 있게 했던 자극은 포스터 세션과 마지막 날 밤의 파티였습니다. 다른 CSHL 미팅의 스케줄을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외국학회에서의 포스터 세션은 독립되어 진행됩니다 (제가 2002년 참가했던 20000여명이 모이는 ASCB 미팅도 그랬습니다). 이는 현재 국내학회에서 포스터 세션을 심포지엄이나 콜로키움 시간과 중복되게 배정해 놓은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모든 학회 참가자들이 심포지움을 끝내고 함께 포스터 세션 장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교수, 학생, 포스트닥 모두가 함께 진지하고 활발한 한 시간여 동안의 토론을 벌입니다. 우리나라의 학회에 십여 차례 참석했었지만 그렇게 활발하고 실용적인 포스터 세션을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CSHL 미팅의 포스터 세션에서는 대학원생-대학원생, 대학원생-포스트닥. 대학원생-교수 간의 실질적인 물물교환과 정보교환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제 경우에도 제 일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한 실험재료들을 한국에 와서 보내주었고, 제가 필요한 실험재료들의 대부분을 동료 포스트닥과 대학원생의 포스터 앞에서 당사자와 직접 대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 논문의 acknowledgement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자는 이메일이나 팩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지 모르지만, 온라인에서 맺는 관계와 오프라인에서 맺는 관계는 확연히 다릅니다. 인간은 오프라인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고 인간관계가 맺어진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그런 과학자로서의 살아있음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어느 포스터에서는 토론이 격앙돼 싸움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게 과학자로서 느낄 수 있는 희열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 밤의 파티에서는 만찬을 마치고 모두가 작은 펍으로 몰려가 맥주 한잔씩을 손에 쥐고 (물이나 주스도 좋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선전하고, 다른 이들의 일을 듣기도 하고, 실제로 포스트닥 인터뷰가 잡히기도 합니다. 19세기 기체의 운동을 통계학적으로 설명했던 볼츠만은 연구실에서의 토론을 펍으로 옮겨가곤 했다고 합니다. 과학적 토론과 그 열정은 실험실이나 회의실에 묶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그토록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티타임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학에 미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엔 이러한 문화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외국의 포스트닥들이 하는 일을 대학원생들이 하고 있는 곳이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임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과학에 투자하는 재정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리함은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좋은 인재들과 인프라가 존재하지만 과학이라는 문화를 정립시켰던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유럽과 미국의 "과학문화"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변화를 주면 많은 것이 큰 투자 없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권위 앞에 자유로운 과학이라는 문화, 그 자유로운 문화 속에서 성장한 과학자들은 권위와 힘 앞에 한없이 약한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러한 문화에 쉽게 적응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물리적/구조적 변화, 그것뿐입니다.

학회의 포스터 세션을 독립시키면 실질적인 공동연구의 기회는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투자 없이 학제간 연구가 가능하게 됩니다. 대학원생들은 과학하는 즐거움을 알게 될 것이고, 의대로 빠져나가는 이들의 수도 감소하게 될지 모릅니다. 각 과와 연구소의 일정공간을 활용해 보드를 만들고 커피한잔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토론하고 공동연구를 하게 될 겁니다. 토론이 연장될 수 있는 작은 스탠딩 펍을 만드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서서 마시는 술자리는 고정된 자리 없이 더 많은 사람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 작은 물리적 변화가 실제로 문화를 창출하는 핵심입니다.

작년부터 혼자의 힘이지만 제 포스터의 상단에 "포스터 세션은 과학적 학술교류의 중심입니다. 대한민국 과학학술 교류의 발전을 위해 포스터 세션의 독립적인 진행을 원합니다" 라는 문구를 넣고 있습니다. 현재는 저와 제 지인들이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내에 만든 "포항생물학그룹 Pohang Biology Group"을 통해 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2. EMBO J., advance online publication 22 November 2007
"Anti-inflammatory lipid mediator 15d-PGJ2 inhibits translation through inactivation of eIF4A"

- 논문관련 분야의 소개, 동향, 전망

유전정보의 전달과정이 DNA에서 RNA를 거쳐 Protein에서 완결된다고 배우지만 많은 사람들이 DNA에서 RNA로의 정보전달과 그 조절과정에 연구의 역량을 집중해 왔습니다. 전사야 말로 분자생물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분야입니다. 또 연구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정보는 RNA에서 종결됩니다. 세포의 RNA중 가장 많은 rRNA의 정보가 그렇고 최근 많은 분들이 연구하고 계시는 microRNA의 정보가 그렇습니다. RNA는 연구하기 어려운 물질입니다. 그 자체가 불안정하고 매우 까다로운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일 겁니다. 또 지나치게 많은 연구들이 전사와 신호전달에 집중되어 RNA에서 protein으로 가는 정보전달 과정인 번역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근의 microRNA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DNA로부터 protein으로 가는 정보전달의 길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Translational control은 그 전달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목입니다. NMD, Stress Granule, Heat shock response, Processing body 등 많은 조절의 접점이 실제 세포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가 혹여 RNA에 만들어 지더라도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실험실에서는 그 소외되어 온 translational control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는 염증반응에서 번역조절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염증반응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외부물질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염증은 반드시 필요한 반응이지만, 지나치거나 조절되지 않을 경우 우리 몸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조치 후의 항염증 반응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염증반응은 없느니만 못한 짐이 되어 버립니다. 2005년 MCB에 출판된 논문을 통해 세포내의 단백질 번역 조절의 주요 장소인 Stress Granule이 염증반응의 주요인자인 TRAF2를 고립시킴으로써 효과적으로 항염증 반응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를 통해 항염증 반응과 번역조절 사이의 링크를 처음으로 규명했고 새로운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몸에는 항염증 반응을 유도하게 하는 많은 물질들이 존재합니다. Cytokine 시스템이 그 하나고 아민계열의 물질이나 지질계열의 물질들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테스트 결과 cyclopentone prostaglandin의 일종인 15d-PGJ2가 세포의 번역을 효과적으로 저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타깃 단백질인 세포 내 단백질 개시에 필수적인 eIF4A라는 helicase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염증반응의 후반기에 macrophage나 기타 세포들로부터 만들어지는 15d-PGJ2가 세포의 단백질 번역을 저해함으로써 활성화된 세포의 신진대사를 막고 항염증 반응을 시작 할 수 있게 함을 의미합니다.

염증반응과 암은 세포의 증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15d-PGJ2의 항암기능과 항염기능은 지금까지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제 연구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15d-PGJ2의 기능이 eIF4A의 기능을 막음으로써 수행된다는 것입니다. 즉 세포의 번역개시인자 조절이 암이나 염증반응을 막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연구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

운이 따랐던 연구였습니다. 연구 도중 그 동안 번역조절 분야에서도 그리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eIF4A가 PDCD4라는 종양억제인자의 타깃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바다해면에서 추출된 항암물질인 pateamineA가 eIF4A를 타깃으로 한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또 저를 잠시 기쁘게도 또 불안하게 했던 것은 연구 도중 외국의 다른 그룹이 광범위한 프로테오믹스 연구를 통해 eIF4A가 15d-PGJ2의 타깃임을 밝혔던 일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그룹의 연구는 actin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연구자들은 eIF4A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했고, 다행히도 제 연구가 이미 논문을 준비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연구가 계속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값진 경험이었던 것은 제가 이를 통해 과학연구에 여러 길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대과학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과학연구에는 분명 유행이 존재하지만, 또 다양성이야 말로 과학을 살아 있게 하는 다른 축일 겁니다. 똑같이 eIF4A를 찾았지만 외국그룹의 경우는 무작위적인 High-throughput 연구의 결과였기 때문에 생리학적 기능을 중요시 하는 분자생물학적 기술에 서툴렀습니다. 전 15d-PGJ2가 translation initiation blockage의 marker인 stress granule을 유도한다는 생리학적 관찰결과로부터 탐정처럼 수사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같았지만 그 해석은 판이하게 달랐고 그것이 제게는 큰 각성이 되었습니다. 마치 보는 각도에서마다 다르게 보이는 제주의 성산 일출봉처럼 보고자 하는 목표가 연구의 방향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3.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

15d-PGJ2의 타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꽤나 많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제 실험결과로부터 도출되는 가설은 두 가지 단백질이 타깃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었고, 저는 eIF4A가 아닌 eIF4G라는 단백질이 타깃일거라고 확신하고 실험을 진행했었습니다. 가설이 결과를 앞서가는 경우였죠. eIF4G는 번역개시에 필요한 많은 단백질들과 직접 결합하고 세포의 번역에 매우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15d-PGJ2가 번역을 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실험은 갈수록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 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수줍게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제가 제 가설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서야 오래된 필름에서 eIF4A가 타깃이라는 증거가 보이더군요. 그리고 나서의 실험은 쉬웠습니다. 혹시라도 스스로가 자연이 말하고 있는 바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고정된 자로 자연을 재고 있지는 않은지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이미 2005년 겨울, 우리는 쓰디쓴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마음을 비우고 사고하는 습관은 과학자에게 매우 좋은 경험이 될 듯싶습니다. 관찰결과에 이론이 순응하는 것이 과학연구의 핵심은 아닐까 하는 서투른 생각을 합니다.

연구가 마무리 될 무렵부터 많은 공동연구거리가 생겼습니다. 제 연구가 Mouse genetics, Xenopus and Zebrafish development, Structural Biology, Modeling 등의 연구와 융합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입니다. 공동연구의 많은 부분이 제가 만든 "포항생물학그룹"의 intranetwork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공동연구에 관한 제 철학은 PBG의 정관에 쓰여 있습니다만 한가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학제간 연구에 앞서 효율적인 학내간 연구가 필요합니다. 같은 과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잘 모르는 것이 대학원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효율적인 학내간 인프라의 구축이 있다면 학제간 연구의 벽은 좀더 낮추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4. 마지막 한마디

과학에 대한 열정을 가르쳐주신 제 교수님과 제가 과학자의 길을 걷는데 한없는 지지를 보내주시는 제 부모님께 감사 드립니다.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첫 번째 질문에서 이미 이루었고 다른 하나는 유치하지만 제 개인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제가 사랑하는 한 분에게 청혼하고 싶습니다.

"혜영! 사랑합니다. 함께 춤추며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당신만이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by 취어생 | 2007/11/27 21:13 | 발표된 글들 | 트랙백 | 덧글(2)
2007년 11월 15일
졸업합니다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 펜을 접고 (펜을 접었던 이유는 여럿 있습니다만 훗날 소개하겠습니다) 손이 시키는 대로, 지인들과 즐겁게 실험하다보니 졸업이 가까워 왔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리도 혐오하던 미국으로 나갈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행동하겠습니다.
by 취어생 | 2007/11/15 16:25 | 트랙백 | 덧글(6)
2007년 02월 26일
포항생물학그룹

내가 포항공대에 해준 것이 있다면, 또 누군가 나를 이곳에서 혹여라도 기억해준다면, 아마 '고전강독회''포항생물학그룹'을 만들고 떠났다는 것이 될 듯 싶다. 하나는 과학을 통한 지식의 확장을 목적으로, 또 다른 하나는 과학 그 자체의 활력을 위해 만들었다. 이 두 그룹이 서로 알게되고 교류를 하게 될런지는 미지수이다. 이것은 내가 포항에서 행한 하나의 실험이고 만일 그 두 그룹이 자연스레 만나 교류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땅에도 과학이 성장할 수 있는 거름이 마련된 증거가 될 것이다. 고전강독회는 과학에 작용하는 외적요인의 중요성을, 포항생물학그룹은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적요인의 중요성을 위해 설립된 것이다. 누군가 언젠가는 그 각 그룹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자그마한 씨앗이라도 이 땅에 뿌려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나로서는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니까.

포항생물학그룹 (PBG: Pohang Biology Group)은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연구자들의 실험실간 교류를  활성화할 목적으로 2006년 11월 김우재와 하상훈의 발의로 시작되었습니다. 2006년 11월 10일 첫모임을 시작으로 현재는 15명 내외의 열정적인 연구자들이 2주에 한번씩 모여 다양한 시각으로 연구에 관해 토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모입니다.


1. 우리는 과학이 열린 시스템임을 믿습니다.

결국 과학이란 자연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입니다. 일반적인 지식이란 누구나 그것을 재현해 볼 수 있고 또 시공을 초월하여 재현되는 결과를 말합니다. 따라서 과학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뛰어나와 자신의 연구를 타인에게 공개하고 비판하고 수정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진보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2. 우리는 동료들과의 토론이 연구의 일부분임을 알고 행동합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실험실에서 수행한 고독한 연구과정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과의 티타임이 자신의 업적에 훨씬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고백하듯이, 우리는 동료들과의 열띤 토론이 때론 며칠간의 실험보다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실천합니다.

3. 우리는 감정을 배제한 토론이 가능함을 믿습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기에 격렬한 토론의 와중에 서로 감정을 염려하며 자칫 토론의 본취지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공격과 또 이 공격에 대한 대응이 과학의 본래 모습이며, 이러한 태도는 감정적인 태도와 별개로 생각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공개토론에서 싸우고 술자리에서 웃고 떠듭니다.


포항생물학그룹에 참여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룹의 멤버가 되면 멤버에게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공개토론의 장에 올려놓을 의무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모두가 발전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항생물학그룹의 멤버가 되고 싶다면 주변에 있는 현재 멤버들을 통해 2주에 한번씩 열리는 정기모임과 정기모임과 별개로 2주에 한번씩 진행되는 친교모임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그룹에 참여하는 데에 별다른 제한은 없습니다. 단 우리는 과학에 대한 열정이 있는 미래의 과학자를 원합니다.


We 'Pohang Biology Group' has founded in Nov. 2006 by Kim Woo Jae and Ha Sang Hoon to encourage the interexchange between labs in Postech Life Science Department. We started our first meeting in 10th Nov. 2006 and now we have about 15 members . We meet once in a every two weeks to discuss the experiments and results of each members'. We meet to fullfill our purpose as below.


1. We have a trust 'Science is an open system'.

Scientific knowledge eventually seeks something to generalize through nature. Generalized knowledge means the reproducibility by anyone, anywhere and anytime. Therfore, we believe science will be advanced by opening researcher's results to others and by having a discussion with these results.

2. We know the scientific discussion itself is a crucial part of the scientific activity and we act on this basis.

As many scientists confess 'tea-time' with other colleague was more critical factor to their sucess than research itself, we recognize well passionate discussion with our colleagues are sometimes more important than several days experiment. We perform this belief.

3. We believe in 'emotion excluded discussion'.

Human beings are emotional animal, so we might mistake passionate scientific disccusion with emotional fight. We know well scietific agressiveness and defense against it is also essential part of science and these kind of activity can be treated away from the emotional activity. We fight in scientific seminar and love each other when we drink.


PBG is open to anyone. One thing to remind for new joiner is you have a duty to open your research to every members of PBG because we have a trust we all grow through this activity. You can simply join us. Just contact anyone who are current members of PBG then just join the formal and social meeting once every two weeks. We don't have any strict restriction to accept members, however we deperately want a future scientist who have a passion for a science.

by 취어생 | 2007/02/26 16:44 | 잡문모음
2007년 02월 12일
코식 박사님께
Plasmid 하나 공짜로 얻어보려고 겁없이 메일을 보낸 인물의 사고가 나의 궤적을 앞지르고 있다. 뒤늦게 먼저 보낸 편지가 멋적어 너스레를 떠는 기분으로 갈겨쓰다.



Dear Dr. Kenneth S. Kosik

I sent requesting mail to you. Although you send that material or not I want to tell you I am now really feel happy reading your fantastic review papers. Specifically your two papers which were reviewed at Nat Rev Neurosci "Beyond phrenology, at last." and "Synaptic tagging -- who's it?" were really fascinating. And I am now excited there is a scientist who are interested in many aspects of science, philosohical, ethical and even religoius (yes I am strong evolutionist who think having religion is peopls's choice. But I am strongly reject the idea of creationist who want to teach those things in school. In this respect I am agree with Richard Dawkins and Stephen Jay Gould). Yes, your short letter to nature which describes the duelism was also impressive. I am now stopping my experiment to read your papers. As a experiment scientist, sometimes I feel lonley when I was talking about evolution, cognition, philosophy and history of science in front of my colleague. They are not interested in those things. But I like the words from Claude Bernard, "The experimenter who does not know what he is looking for will not understand what he finds.". Bernard always pointed out the relationship between hand and brain. Good scientist, I think should be skillful at both kinds of work, with hand and with deep thought.

Yes, I am now doing experiment everyday but I was and still am real bookworm. I've been reading lots of books realted with evolution, philosophy and history of science, for example, written by Charles Darwin, Thomas Huxley, Ernst Mayr, Theodosius Dobzhansky, John Maynard Smith, George Williams, Imanishi Kinji, Edward Wilson, Jared Diamond, Francois Jacob and Jacques Monod, Richard Dawkins, Stephen Jay Gould and Niles Eldredge, Steven Pinker, Daniel Dennett, David Buss, Stuart Kauffman, Brian Goodwin, Matt Ridley, Gregory Pence, Francisco Varela, Bjorn Lomborg, John Tooby and Leda Cosmides, etc. Nowdays I am reading about history of chemistry written by Eduard Farber "Evolution of chemistry" with a professor in another University near here. William Coleman's book"Bi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was so impressive, you must read it.

Sometimes I am dreaming of the life in the 19th centuries' scientist. There was no border between sciences. There was discussion and romance. Think about Bolzman's debate with Helmholz for the unfication of physics with Energitism. Think about Viena Circle's discussion about science and philosohy mixed and harmonied. whenever I imagine those things, I feel free and happy that I am standing the tradition of them.

I have one paper about "Darwinian medicine" which published in Korean language in <Korean journal of Science and Philosophy>. I am sorry not to show you that paper.

My personal story was too long. I am sorry to take a time from you. I was just happy to see a great scientist who are looking for real science in my field.

Thank you for reading this boring mail.

Best Regards,




Woo Jae Kim

"True science teaches us to doubt and to abstain from ignorance."

by 취어생 | 2007/02/12 18:28 | 잡문모음
2007년 01월 23일
누가 라부아지에를 죽였나
 

 

누가 라부아지에를 죽였나


김우재


프랑스 혁명은 1787년에 시작되어 1789년을 기점으로 폭발하여 이후 1799년에 가서야 마무리된다. 1787년 미국 독립전쟁 참가로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 왕실이 특권층에게서 세금을 더 징수하는 법안을 제시하자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왕실에서 자유로웠던 프랑스의 특권층은 이에 저항하는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귀족반란이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프랑스 혁명은 본격화된다. 프랑스 혁명은 수년 전에 패배를 겪었던 네덜란드 연합왕국, 벨기에, 스위스 등지의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한 영국, 아일랜드, 독일, 합스부르크 제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변화를 원하던 모든 이들이 혁명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국가에서 혁명주의자 클럽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유럽 각지에서 프랑스 혁명에 지지를 보내는 이들을 ‘자코뱅주의자’들이라 불렀는데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프랑스는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흔히 ‘혁명전쟁’이라 부르는 시기가 시작된다. 전쟁은 예견되었던 것으로 유럽의 왕실들은 프랑스 혁명이 진행될수록 자신들의 국가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전쟁이 진행되면서 프랑스의 국내 사정은 어려워졌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공안위원회’가 구성된다. 당통에 의해 시작된 온건파는 곧 로비스피에르의 급진적 혁명세력으로 교체되며 이들이 주도한 1793년 7월부터 1794년 9월까지의 ‘공포정치’ 중에 약 30만 명이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1만 7,000명이 공식 처형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재판도 못 받고 죽었다. 라부아지에는 로비스피에르에 의한 공안위원회가 집권했던 1794년 5월 8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과학자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라부아지에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일화는 프랑스 혁명의 중심에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와의 악연이다. 흔히 프랑스 혁명 중 산악당(The Mountain)의 상징으로만 잘 알려져 있는 마라는 자신의 업적이 뉴턴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의사이자 과학자였다.


장 폴 마라는 1743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770년대 런던에서 의사로 성공을 거두면서 유명세를 타는데 그 전까지는 프랑스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름 없이 지내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영국에서 명성을 얻은 마라는 과학과 철학을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한다. 그의 첫 번째 책은 1771년에 저술한〈인간영혼론 Essay on the Human Soul>으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 1773년 <인간영혼론>을 개정 증보한 <철학적 인간론 A Philosophical Essay on Man 혹은 the Principles and the Laws of the Influence of the Soul on the Body and the Body on the Soul>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1775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도 출판되었다. 당시의 암스테르담은 무역의 중심지로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중요한 책들이 이곳에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의사로서 관심을 가졌던 과학적 저술 이외에도 그는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적 인간론>이 인기를 얻은 다음해인 1774년 영국 유권자들을 상대로 전제정치를 고발한 〈노예제의 사슬 The Chains of Slavery〉을 출판하는데, 몇몇 학자에 따르면 그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귀족주의적' 또는 '궁정적‘ 음모라는 개념을 밝혔다고 한다. 이 개념은 수많은 그의 위대한 연설과 논문에 일관된 중심주제가 된다. 런던에서 그는 매우 구체적인 질병에 관한 의학서적도 출판했다. 1775년에는 <Essay on Gleets 만성 요도염에 관한 에세이>가, 1776년에는 노안에 관한 저술인 <An Inquiry into a Singular Disease of Eyes 눈에 발생하는 희귀질병에 관한 탐구>가 출판된다. 이 저술들은 그가 1775년 의학박사 학위를 스코틀랜드에서 취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사로서의 훈련 과정 중에 저술된 것으로 짐작된다.


<철학적 인간론>은 그의 자연관을 잘 함축하고 있는 책이다. 정통적인 데카르트적 심신 이원론자로서 그는 신은 인간이라는 기계의 밖에 존재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 육체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신이 자연을 조절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마라에게 육체란 정신의 기관으로서 일종의 기계였다.


책은 4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 1장은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그가 정통했던 해부학적 지식을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육체가 정신의 기관으로서 일종의 기계라는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제 2장은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부분이다. 인간의 육체는 그 자체로는 죽은 것이다. 육체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은 영혼으로 영혼은 보이지 않는 용수철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인간을 지적이게 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도 모두 영혼의 작용이다. 제 2장은 엘베시우스(Hevetius)에 대한 반박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엘베시우스(1715-1771)는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프랑스 철학자로 인식은 모두 감각에 의거한다고 생각했을 뿐만이 아니라, 유물론의 입장에서 종교나 교회를 비판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수 있는 능력이 똑같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에서 그는 루소의 교육서 〈에밀 Émile〉을 논박했고 〈인간론 De L'homme〉(1772)을 저술하여 교육을 통해 인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마라의 반박이 집중된 곳은 엘베시우스가 유물론의 입장에서 감각만으로 인간의 인식을 설명하려 했던 부분이었다. 데카르트주의자로서 마라에게 육체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기계였다. 따라서 제 3장에서 그는 잠과 꿈이라는 현상을 통해 영혼이 육체에게, 육체가 영혼에게 미치는 영향을 증명하고자 했다. 마라 자신의 잠과 꿈을 근거로 상세히 기술 된 제 3장을 통해 그는 구시대의 병약한 영혼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이들처럼 병든 육체를 가진 사람들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를 즐기며 반대로 건강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이들은 부드럽고 건전한 문화를 즐긴다고 주장했다. 건전한 영혼을 가진 이들이 특히 선호하는 향기는 재스민과 장미향이다. 제 4장은 육체와 영혼이 상호작용하는 작동 방식을 다룬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는 그 어떤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양자는 자연계에서 구분되는 독특한 존재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존재함이 이미 밝혀졌다. 따라서 그 관계가 일시적이지 않다면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독특한 관계는 제 3의 인자 혹은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중간자는 육체와 같이 완전한 물질도 아니고 영혼처럼 완전한 비물질도 아닌 어떤 중간적인 존재로 신경물질에 활성을 부여하며 두뇌에 그 대부분이 존재하고 있다. 마라는 이러한 중간자를 “신경액 (nerve fluids)"라고 불렀다. 신경액이라 불리는 이 신비로운 체액은 섬유질과 육체의 각 기관들과 결합하여 움직이며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마라는 유물론적 철학으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엘베시우스를 반박하면서 생리학으로 심신의 연결문제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주장한 신경액이라는 미지의 중간자를 송과선으로 대체함으로서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바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데카르트의 저서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들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책 <철학적 인간론>은 데카르트 철학의 변주였고 마라 또한 철저한 데카르트주의자였다. 마라의 책 <철학적 인간론>은 볼테르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당한다. 볼테르는 이 책의 스타일을 조롱했고 마라의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수사학적 웅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볼테르의 비판은 마라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마라는 1777년 대륙으로 돌아온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막내동생인 아르투아 백작(후에 샤를 10세가 됨)의 사병들을 담당하는 의사로 임명된 그는 주로 성공한 과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그는 과학논문을 쓰고 주로 불, 전기, 빛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다. 특히 그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전기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파리에 머무르던 이 시기에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태양 현미경(Solar Microscope)"을 이용한 실험결과를 <Discoveries on fire, electricity and light 불, 전기, 빛에 관한 발견>(1779)이라는 짧은 에세이로 출판한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그가 태양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불액 (igneous fluid)“이라는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짧은 팜플렛에는 그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도움으로 직접 수행한 66가지의 실험이 소개되어 있고 7개의 삽화가 곁들여져 있다. 실제로 마라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많은 서신을 교류했고 프랭클린의 전기와 관련된 실험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프랑스 과학학술원 French Academy of Science>의 관심을 받았고 허가도 얻었지만 학술원은 마라가 정립하고자 한 이론 자체는 거부했으며 이러한 학술원의 무시가 마라와 학술원 사이의 관계악화의 불씨가 된다. 그는 혁명 전까지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 자격을 얻지 못했고 이에 대해 자신이 순교자가 된 기분으로 과학을 하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의 관심은 의학과 과학 그리고 정치에 고루 분배되어 있었는데 이는 <불, 전기, 빛에 관한 발견>을 저술한 시기에 분야가 완전히 다른 저술인 <Plan of Criminal Legislation 형법 입안>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미 런던 시절에서부터 <노예제의 사슬>을 저술하며 정치와 사회에 큰 관심을 보이던 개혁적인 마라가 곧 일어날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불과 전기 그리고 빛에 관한 그의 관심은 이시기 <Physical Research on Fire 불에 관한 물리적 연구>(1780), <Physical Research on Electricity 전기에 관한 물리적 연구>(1782), <Medical electricity 전기의 의학적 사용>(1783)으로 이어지고 <전기의 의학적 사용>은 1783년 왕립 과학학술원(Royal Academy of Sciences in Rouen)에서 주는 상을 수상한다. 이시기에 출판된 책들의 대부분은 마라 자신이 직접 돈을 대고 출판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빛에 관한 책으로 그는 강사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많은 강의를 했다. <빛에 관한 물리적 연구>는 독일어로도 출판되었고 괴테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중상류계층과 귀족계층 환자들을 치료해 개업의로서도 기반을 쌓은 그는 1783년 그는 의사직을 그만두었는데 그동안의 노력으로 쌓은 과학자로서의 명성에 집중하겠다는 야심이 그런 결정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알려진다.

 


1784년에는 뉴턴의 광학에 관한 일종의 비판서인 <Elementary Notions in Optics 광학에 대한 소고>를 출판했고 1787년에는 익명으로 뉴턴의 광학을 번역해 출판했다. 이 책은 그의 이니셜만이 기록된 상태로 출판되었는데 마라 자신이 그의 정치적 적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의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라의 마지막 과학 저술은 1788에 출판된 <Academical Essays or New Discoveries on Light 빛에 관한 학술적 에세이 혹은 새로운 발견>이다. 이 저술 또한 뉴턴의 광학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관한 주장을 담고 있다.


마라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고 런던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프랑스로 금의환향하면서 프랑스 과학학술원에서 자신을 회원으로 받아줄 것이라 기대했던 듯하다. 그의 이러한 소망은 1779년부터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78년까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라부아지에는 마라의 책 <Physical Researches on Fire 불에 관한 물리적 연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마라가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회원이 될 자격이 없는 애송이라고 말했다. 마라의 독일어판 책에 찬사를 보냈던 괴테는 프랑스아카데미의 거절을 과학적 독재라고 표현했지만 마라가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했던 것은 마라의 표현처럼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나 정치적 이해도 아니고 괴테의 표현처럼 과학적 독재만도 아니었다. 당시의 프랑스 과학계에서 뉴턴은 예전처럼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뉴턴의 고전역학을 중심으로 프랑스 과학이 재정립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라, 라부아지에, 데카르트, 뉴턴


뉴턴 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었을 당시 데카르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프랑스 학계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 위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되고 국제정치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학술 교류는 말브랑슈 (Nicolas Malebranche, 1638-1715)를 시작으로 모퍼티 (Pierre-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 클레로 (Alexi Clairaut, 1713-1765), 볼테르 (Voltaire, 1694-1778) 등의 급진적 뉴턴주의자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볼테르가 영국에서의 망명 생활 뒤 프랑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뉴턴 소개에 힘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뉴턴철학의 요소들 Élé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은 프랑스에서 일반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뉴턴에 관해 씌어진 최초의 책이었다고 한다. 마라의 초기저작이 볼테르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당하는 것은 볼테르가 프랑스에 뉴턴을 수입한 장본인이고 당시 뉴턴주의자들과 데카르트주의자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볼테르의 애인이었던 샤틀레 부인은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모퍼티 ‘최소작용의 원리’를 천명하며 뉴턴 철학의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전파된 뉴턴의 과학은 다양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논쟁은 지구의 형태와 관련되어 있다. 데카르트의 소용돌이(vortex) 이론에 의하면 지구는 대체로 구형이지만 적도 지방이 극지방에 비해 보다 평평해야만 한다. 반면 뉴턴의 이론은 적도 지방보다는 극지방이 평평하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 일종의 국가적 논쟁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1730년대를 통해 극지방과 적도지방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일련의 지구 측정 탐사를 계획했고 이런 일련의 탐사 작업의 결과 뉴턴의 이론이 확증된다. 달의 운동과 핼리 혜성의 운동에 관한 것도 뉴턴 역학의 유효성을 둘러싸고 벌였던 대표적인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는 장 달랑베르 (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오일러 (Leonhard Euler, 1707-1783), 라그랑주(Joséph Louis Lagrange, 1736-1813) 등이 당대의 천재적인 학자들이 참가했고 삼체문제를 비롯한 천체역학의 계산 테크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뉴턴의 이론이 프랑스에 수입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조직이 바로 프랑스 과학학술원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했던 프랑스의 과학 학술원은 이시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마라가 활동했던 시기가 바로 뉴턴의 이론이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시기였고 프랑스 과학학술원에는 뉴턴주의자들이 이미 데카르트주의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라부아지에도 -완전한 뉴턴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뉴턴의 기계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는 라부아지에의 적이었던 영국의 프리스틀리도 마찬가지였다. 뉴턴의 과학은 당시의 프랑스 과학자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고 마라는 그 유행에서 많이 비껴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라부아지에가 프리스틀리와 논쟁을 벌이기는 했으나 둘은 모두 뉴턴주의자였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와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눈에 데카르트의 송과선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라의 <철학적 인간론>이나, 뉴턴의 광학을 비판하는 <불, 전기, 빛에 관한 발견>이 받아들여질리 없었다. <노예제의 사슬>과 같은 책을 저술한 마라의 정치적 성향도 이러한 학술원의 거부에 일조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놓고 볼 때 마라가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한 것은 단순히 마라에 대한 개인적/정치적 억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라의 의사/ 과학자로서의 경력은 유행에 크게 뒤쳐져 있었고 이미 성공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던 것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마라는 학술원의 회원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었고 그 주범으로 라부아지에를 꼽았다는 것이다. 마라가 실제로 1788년의 저술을 마지막으로 과학에 대한 열정을 접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이 회원에 선출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아니면 때마침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 그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성향이 동조해 과학에 대한 열정을 잃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마라가 친구들에게 프랑스 과학학술원이 자신을 음해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보아 과학자로서 조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그의 자괴감이 컸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 원한이 모두 라부아지에에게 집중되어 마라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라부아지에를 단두대에 올린 것이 과연 사실일까. 20여년을 과학자로 성공하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력했던 인물이 실패했다면 그 원한이 깊을 만도 하다.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단순히 마라의 원한으로 치부하기에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직접 적으로 규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 직후 <Offering to the Country 조국에 제안하는 글>을 발표했고 1789년 9월부터는〈The Friend of the People 민중의 친구〉라는 신문의 편집 일을 맡으면서 가장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의 유력한 대변자로 떠오르게 된다. 신문을 통해 그는 권력을 가진 모든 이들을 민중의 적으로 선언했고 이러한 정치적 글 속에는 라부아지에를 자신들의 적으로 선언하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라부아지에 개인에 관한 것이었는지 프랑스 과학학술원에 대한 분노가 라부아지에를 통해 표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라와 라부아지에의 관계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죽였는가?


첫째, 마라가 학술원의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어야 했다면 그것은 라부아지에가 아니라 자끄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 1746-1823)이어야 했을 것이다. 샤를은 발명가이자 화학자였고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수소기구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고 습도계(濕度計)와 반사측각기를 비롯하여 몇 개의 발명품들을 개발했고, 그라버산드 헬리오스탯(Gravesand heliostat)과 파런하이트 공기량계를 개선했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 실험을 확인하기도 했다. 화학자로서 그는 이상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비례한다는 “Charles' Law 샤를의 법칙”을 발견해 정식화했고(V1/T1=V2/T2) 이는 현재 “보일-샤를의 법칙”으로 교과서에 실리는 바로 그 법칙의 원형이다. 샤를의 법칙은 1802년 게이 뤼삭(Joseph Louis Gay-Lussac)에 의해 정식화된 열과 기체부피에 관한 법칙의 기초가 된다. 샤를은 1793년 프랑스 과학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샤를은 마라보다 세살 어린 동년배였다. 마라가 프랑스에 돌아와 태양 현미경을 설계하고 이를 통해 발견한 불액의 존재를 발표한 시기가 1779년이었다. 이 출판은 학술원의 관심을 끌었지만 마라의 빛에 대한 이론은 뉴턴의 광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학술원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 당시 마라의 태양현미경과 불액의 발견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인물이 바로 샤를이었다. 샤를은 마라의 불액이라는 것이 단순히 몸 주위에서 데워진 뜨거운 공기가 빛을 굴절시키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샤를은 따로 메가스코프를 개발한 발명가이기도 했고 이를 통해 마라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었다. 샤를은 대중강연을 통해 마라의 실험을 조롱했고 마라가 그 강연에 참석해 둘의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실제로 마라는 샤를을 무대 위의 마술사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평하며 그에 대한 악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만약 마라의 학술원에 대한 감정이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라부아지에를 처형시킬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면 마라가 혁명의 중심에서 정치적 권력을 얻어가던 당시 샤를 또한 단두대에서 처형당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해에 학술원의 회원으로 무사히 선출되었고 혁명 중에도 처형 받지 않았다.


둘째, 마라가 ‘민중의 친구’를 통해 1789년부터 라부아지에를 적으로 규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처형해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하게 된 계기는 학술원의 일과는 거리가 먼 ‘Paris Wall 파리 장벽’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과학적 활동 못지않게 정치적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실 당시의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까웠다. 그는 공중보건, 대포제작, 학교교육을 위한 위원회뿐만 아니라 심지어 병원, 교도소 시설 개량을 위해 설치된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블루아 근처의 영지에서 모범적인 농장을 운영하여 과학적 영농법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했고, 1785년 농업개선을 위한 정부 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여러 가지 영농법을 추천한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입안했다. 한편 오를레앙 지방에서는 저축은행, 보험협회, 운하·창고제도, 조세개혁 등의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790년에는 전 프랑스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위원회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 중에도 활발히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1789년 삼부회가 재개되자 라부아지에는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위원들의 강령을 초안했고, 파리 코뮌(자치사회)위원으로 온건파정당에 가입했다. 그 후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행정관으로 국가재정과 농업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하나의 딱지가 붙어 다녔다. 라부아지에는 전직 세금징수관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관리직이기는 했으나 라부아지에는 페르메 제네랄레(farmer's general)의 멤버였다. 한명의 세금징수관 밑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징수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둬들였다. 세금징수관들은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왕과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일쑤였으며 당연히 프랑스 국민들로 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또한 그의 부인은 페르메의 전 멤버의 딸이었다. 뒤에 언급되겠지만 라부아지에의 처형은 그의 이 딱지로 인해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실제로 그와 장인의 전력은 혁명 기간 중 라부아지에를 권력으로부터 의심을 사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감시와 함께 공격이 계속되었다.


파리 장벽이란 파리를 드나드는 상품들에 관세를 메기기 위한 조치로 라부아지에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는 파리 주위에 커다란 장벽을 설치하면 주류나 담배의 밀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3백만 리브루를 들여 레독스라는 건축가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이 제안은 시민들로부터 엄청나게 적대적인 반응을 유도했다. 거리에는 파리 장벽을 반대하는 문구들이 도배되었다. 시민의 삶에 적대적이었던 라부아지에의 이런 제안은 개혁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던 마라의 극렬한 반대를 유도했다. 1792년 마라는 글을 통해 라부아지에의 귀족적 성향을 비판했고 그의 부정을 폭로한다. 마라의 라부아지에에 대한 비판이 비록 개인적 원한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마라가 샤를을 처형하지 않은 것이나 파리 장벽 사건을 계기로 라부아지에에 대한 공격의 수위가 상승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마라와 라부아지에의 악연은 사적인 감정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큰 듯하다.


셋째, 마라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마라는 복잡한 정치적 구도 속에서 1793년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여인에 의해 욕실에서 암살당했다. 마라는 지독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자주 목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중요한 점은 그의 죽음 뒤에도 라부아지에의 사형 집행이 중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혁명이 지난 2년 후인 1791년에 국민의회가 징수인 조합의 폐지를 보고하고 이후 2년의 여유를 주어 조합재정을 청산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세금징수관들은 이 작업을 매우 느리게 진행시켜 2년이 다 지나도록 청산하지 않았다. 이 불필요한 지연과 또 다른 이유에 의해 그들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1793년 11월에 한 의원이 이들의 체포를 요구했다. 국민의회는 관례에 따라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모든 세금징수관들의 체포를 명령한다. 문제의 한 의원이 마라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마라는 1793년의 7월 13일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1793년 말 체포된 세금징수관들은 1794년 5월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이 났고, 라부아지에는 장인을 비롯한 27명의 다른 세금징수관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5월 8일 오후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라부아지에의 처형이 집행되었다. 재판 중에 라부아지에가 프랑스에 커다란 과학적 공헌을 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탄원이 있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또 어떤 사람은 라부아지에가 진행시키고 있는 중요한 실험이 완료될 수 있도록 판결을 일주일 지연시켜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고도 하나 집행관이었던 꼬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로 탄원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마라가 살아 있었어도 라부아지에는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의 처형은 마라의 고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금징수관이라는 직업적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라가 살아 있었으면 라부아지에가 처형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마라는 당통을 동지로 생각했고 당통은 관용파로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와는 정치적인 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안위원회는 1794년 봄 좌파세력(에베르파)과 우파세력(조르주 당통의 추종자들인 관용파)을 모두 제거했다.


이상의 사실들을 조합해 보았을 때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첫째, 마라의 개인적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째, 그의 죽음을 프랑스 과학학술원에 대한 상징적 가해로 보기도 어렵다. 라부아지에가 학술원의 중심인물이기는 했으나 그는 학술원의 대표도 아니었으며 학술원의 회원들 중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인물은 라부아지에 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라그랑쥬도, 라플라스도, 샤를도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프랑스 과학에 대한 탄압인가?


많은 과학사가들은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과학에 대한 탄압이라고 여겼다. 물론 공포정치 기간인 1793년 과학 학술원도 다른 모든 유사한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폐쇄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과학학술원은 왕에 의해 세워진 조직이었다. 대혁명의 기간에 왕권에 의해 세워진 기관들이 폐쇄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물론 대혁명의 기간에 물리학이나 수학에 대한 집중이 생물학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에 자연사 박물관이 설립되었고 비교해부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며 이후 프랑스의 실험생리학 전통이 자리 잡게 된다. 자연사는 대혁명 기간에 정립된 교육 시스템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당시의 교육시스템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지식을 식물학(botany)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원시인류가 자연에 접하면서 약초와 식용식물을 구분하는 섬세한 관찰을 통해 이루어낸 가장 원초적이지만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사에 대한 교육은 원시인류가 과학적 방법을 알아간 방법을 답습하며 학생들을 자연과 친숙하게 하는 좋은 시작으로 생각되었다. 자연사에 대한 강조는 대혁명 이후 퀴비에가 자연사 박물관에 자리를 잡고 프랑스에서 자연사 연구의 학풍을 세우는 기반이 된다.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에 대한 강조에서 디드로, 콩도르세 등의 낭만주의적 유기체론을 차용하며 생물학적 학풍도 강조하는 방식으로의 변화가 생겨났지만 이것을 과학에 대한 탄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교육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전문 교육 기관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1794년 전문 기술교육을 목적으로 창립된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뉴턴주의 과학과 수리과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개교 당시 400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는 당대 일류의 과학자들이 교수진이 되어 학생들에게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아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라플라스, 화법기하학을 창시한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라그랑주, 베르톨렛, 결정학자 아위 (René Just Haüy, 1743-1822) 등이 모두 당시 이 새롭게 창립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들이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수많은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을 배출하면서 그 동안 수리과학과는 다른 전통 속에서 성장해온 경험과학 분야를 수학화 시키고 뉴턴 과학을 고도로 발전시키며 푸아송 , 푸리에, 게이뤼삭 등의 과학자를 배출하는 산실로 자리 잡는다.


라부아지에를 단두대로 밀어 넣은 것은 그가 가진 과학적 업적을 누군가가 질투해서도 아니고, 공안위원회의 과학에 대한 탄압도 아니었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아버지가 사준 귀족의 지위를 이용해 36살의 나이로 세금 징수원이 되었다.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모은다는 구실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를 단두대로 밀어 넣은 것은 세금 징수원이라는 그의 과거행적 때문이었다. 이회창의 아들이 가진 병역문제가 대통령 선거의 변수로 작용했듯이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복잡한 정치구도 속에서 한때는 혁명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라부아지에는 세금징수원이었다는 과거의 전력으로 인해 민중의 적으로 몰려 처형된 것이다. 이는 당시 함께 처형된 인물들 중 전직 세금징수원이었던 그의 장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함께 처형된 이들 중 과학자는 없었다.


세금징수원의 죽음


많은 과학 교과서나 학생용 과학사 서적들은 라부아지에라는 천재적 과학자가 억울하게 단두대에서 처형된 것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조금 고급서적이라고 불리는 저작들은 유치하게도 마라와 라부아지에의 원한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흥미 위주의 과학사 서술을 시도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추적해 보면 당시 라부아지에의 죽음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그는 과학자로서 처벌된 것이 아니라 세금징수원으로 얻은 부에 대해 처벌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처형이라는 방법이 잔인하기는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능력 때문에 그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교육학적으로도 나쁘다. 그렇다면 유능했던 친일파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와 함께 처형된 27명 모두가 억울해야 할 것이다. 좁은 소견으로 추적해 본 역사는 라부아지에가 온당 받을만한 벌을 받았다고 말한다. 특히 마라와의 원한 관계에 의한 처형이라는 에피소드는 성립될 수 없다. 이 점은 위에서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라부아지에는 과학자로 죽은 것이 아니라 세금징수원으로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대과학자의 비극적인 죽음도 아니었고 프랑스 과학에 대한 탄압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유를 평등을 갈망하던 민중들의 분노와 대혁명을 이끌었던 정치인들 간의 권력 투쟁 속에서 그렇게 죽었을 뿐이다.


참고문헌


1. Jean-Paul Marat The People’s Friend, Ernest Belfort Bax, London, 1900, 이 책은 http://www.marxists.org/archive/bax/1900/marat/index.htm 에서 볼 수 있다.

2. Jean Paul Marat: His Life http://seni.club.fr/life_of_marat.html

3. The Great Asymmetry, Stephen Jay Gould, Science, 1998: Vol. 279. no. 5352, pp. 812 - 813.

4. Science in the French Revolution, Charles Coulston Gillispie, PNAS 1959 45: 677-684

5.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Crisis of Science, http://www.bookrags.com/research/the-french-revolution-and-the-crisi-scit-041234/

6. Science, Education and the French Revolution, L. Pearce Williams, Isis, Vol. 44, No. 4. (Dec., 1953), pp. 311-330.

7.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한 자료들은 엠파스의 백과사전을 이용했다.

8.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라가 주고받은 편지는 http://franklinpapers.org/franklin/framedNames.jsp?ssn=001-56-0180 에서 볼 수 있다.

by 취어생 | 2007/01/23 10:36 | 상식과 추측 | 트랙백(1)
2007년 01월 17일
다시 펜을 잡으며
실험이란 고달픈 자기자신과의 싸움이어서, 실험실이라는 현실과 과학이라는 이상 사이를 오가는 간극과 같아서, 나의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천성은 속일 수 없다기에 다시 펜을 든다. 나의 작업들, 손에 묻힌 피와 땀들, 그 속엔 나를 앞서간 많은 이들의 열정이 녹아 있었고 그 힘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를 기록할 것이다.
by 취어생 | 2007/01/17 12:38 | 잡문모음 | 덧글(4)
2006년 01월 11일
쥐라기 과학
과학은 죽었다.
자연을 해부하고 동경하며 즐거워하던 과학자들은 모두 화석이 되었거나 웃음거리로 돌변했다.

과학은 왜곡되었다.
어설픈 경제논리에 매몰된 과학자들은 인류의 복지를 위한다는 위선 속에서 배를 채우며 돼지 같이 웃는다.

과학은 획일화되었다.
다양성이라는 가치의 핵심은 보험과 같은 것인데도 이미 이 땅의 과학자들은 자로 잰듯 같은 모습이다.

과학은 화석화 되었다.
이제 과학은 배부른 몇몇 프로파간다들의 책 속에서나 동경할 수 있는 박물관의 전시물로 전락했다. 현장 속에 과학은 없다.

이 땅에 아예 과학은 없었고 이제 과학을 되살릴 이유조차 찾을 수 없다. (요즈음 말을 빌리자면 아예 과학따위가 없었으니 바꿔치기당했다는 둥 사기당했다는 둥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오늘 나는 이 땅의 과학에 사망선고를 내린다.
by 취어생 | 2006/01/11 14:35 | 덧글(12)


<< 이전 페이지 |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