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15일
가설 속에서 느끼는 자유


가끔 말이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미워보이는 교수와 내가 짝짝꿍이 맞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를 띄운채 어깨까지 쳐대며 아이처럼 깔깔댈 때가 있다. 토요일에 꼭 나오라는 건 아니지만 연구가 느려지지 않느냐는 식으로 아이들을 죌 때마다 느끼하고 역겨운 감정이 들지만, 그래도 말이다, 가끔 내 감정의 이중주 속에서 배신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기분 좋을 때가 있는 거다.

누군가 몇가지 관찰 혹은 실험 결과를 들고 그룹미팅에 들어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험이 잘 되었느냐, 오차는 작았느냐 등에 관심을 먼저 보이는게 상례지만, 내 경우엔 그 결과에 맞는 가설을 세워주고 그 가설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실험을 디자인 해주는 것이 상례다. 아직 잘 모르는 자연 속의 어떤 미지의 현상, 그 현상의 단초만을 가지고 두뇌속에 쳐박아 두었던 자신만의 경험을 엮어 우리는 가설을 만들어 낸다. 의외로 우리 교수가 이런 작업에 능하다. 가끔 그의 이런 기발함은 학생들을 궁지로 내몬다. 검증 불가능한 가설을 만들어 내니까. 그런 무모한 가설을 우리는 소설이라고 부른다. 교수의 소설에 놀아나다 졸업을 늦게 하거나 고생한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나도 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는 하지만 소설은 검증가능한 실험과 도구가 갖추어졌을 때 가설이 된다. 그리고 소설을 쓰느냐 가설을 만드느냐는 어쩌면 실험을 하지 않는 교수와 실험을 하고 있는 학생이라는 환경 차이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래도 말이다. 가끔 칠판 가득 그림을 그리고, 우리가 아는 분자들의 이름을 가득 적어가며, 화살표를 그리고, 조립하고, 부수고, 논쟁할 때는 말이다, 나는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런 자연의 탐구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교수가, 자신이 사랑하는 분야의 연구는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연구비를 전혀 엉뚱하게 타내야만 한다는 현실이 가끔은 밉다. 어쩌면 말이다. 연구비의 압박이 과학자를 월화수목금금금의 사지로 내모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교수도 그 피해자라면 좋겠다. 센터로 오기전까지 분명히 우리 교수에겐 여유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작은 단서로 자연 속에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또 존재할 하나의 현상을 찾고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신비로운 체험이다. 황교주님은 그렇지 않겠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희열 속에서 과학에 종사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돈이 안된다.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시도들 속에서 돈이 되는 뭔가가 분명히 등장할 테지만, 국가 주도적인 거대 과학속에서 그런 모험은 투자받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은, 과학은, 과학자는 어쩌면 우리 세대를 마지막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요즈음 너무 강하게 드는 것이다.
by 취어생 | 2005/12/15 13:30 | 잡문모음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덧말제이 at 2005/12/15 14:20
장기적으로 보고 투자를 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너무 빨리빨리 결과를, 그것도 돈이 되는 결과를 내놓으라는 게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연구비의 압박도 결국은 거기서 비롯되는 거겠지요.
교수와 학생의 환경 차이라는 거, 그것 때문에 괴롭던 시절도 생각나네요. 막 우기실 땐 참... ^^;
Commented by 취어생 at 2005/12/15 16:01
참, 거시기하죠. ㅋ~~
Commented by 신승원 at 2005/12/19 16:53
요새 라면황 이라는 말이 유행이길래 뭔소린가 했더니 맨날 라면만 먹는다고 라면황이라네요...ㅋㅋ 형도 랩에서 맨날 라면만 먹는거 아니죠? 교수님이 밥은 잘 사주시나요? 날도 추운데 밥이라도 잘 챙겨 드삼!
Commented by Roman at 2005/12/20 00:16
이 시대는 어쩌면, 그 어떤 분야에서도 엔터테이너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들게하는 시대입니다.
Commented by browne at 2005/12/21 11:34
덕분에 좋은 공부를 하게되어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내년에도 연구 열씨미하시고 좋은 포스팅 기대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취어생 at 2005/12/21 19:38
로만/ 엔터네이너라기보다는 '낙천'을 아는 사람. ㅋ
브라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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