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1일
빗나간 일부 교회 세력의 복음주의와 과학!
원문: 빗나간 일부 교회 세력의 복음주의와 과학!

철학적 인류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이 신학과 만났을 때 한 가지 과거의 전통적인 규정 방식은 이렇다. 인간의 본질은 '신을 찾는 것' 혹은 '신의 섭리'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규정 방식은 19세기만 해도 꽤나 유행한 것이었고, 역으로 철학적 인류학에서 신을 추방하려는 운동도 있었다. 니체가 그렇고 실존주의의 한 경향이 그랬다.

과학을 도용하는 대한민국의 요상한 복음주의를 한번 규정해보자. 이를 위해서 신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규정 방식과 과학의 관계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신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때 이 규정 방식은 비역사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철학자 중에는 Max Schlegel 등이 신을 찾는 인간의 본질을 보편적인 진리로 규정하려고 애썼다. 그는 곧 다윈의 진화론이 그러한 본질과 양립 가능한가를 묻게 되었고, 다윈 진화론의 한계를 지적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에 일종의 신학적 한계 설정을 가하는 것이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 한계 설정이 다윈 진화론의 거짓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 그리고 인간의 사회와 역사를 규정하는 데 다윈 진화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다뤄야 한다. 다윈 진화론 등 과학적 발견이 성서의 글자 그대로의 해석과 불일치 하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그 하나의 질문은 이렇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러 대답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1. 신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과학을 포함한 모든 인간 활동은 그 본질을 지향한다.
2. 신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학과 과학이 마찰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신학의 도움으로 과학을 제어해야 한다.
3. 신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학과 과학이 마찰하는 양상에서 우리는 신학의 현재 해석과 과학을 중재할 의무를 갖는다.

신을 찾는 것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신학의 모든 전통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다른 전통은 무시하자. 1번의 경우 과학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는 궁극적인 신학체계 T가 가정되어야 한다. T에 근거해 모든 과학의 이론은 신을 지향해야 한다는 논거를 펼쳐야 한다. 여기서 그 논거는 T와 과학 이론의 양립 가능성이지 결코 그 과학 이론이 신 존재를 증명한다는 식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통 신학에서도 신이 양적으로 다뤄질 그러한 경험적 대상이 아님은 벌써 정착된 것이다. 만약 신 자체가 양적으로 다뤄지는 대상이라면, 신을 찾는 것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는 별도의 '신학적 작업'은 의미가 없어진다. 게다가 측정량과 연관된 과학의 발견과 신을 연결시키는 것은 섭리론이며, 이 섭리론에는 신학이 과학으로 다룰 수 없는 어떤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1은 너무 강하다. 2는 어떤가? 문제는 인간을 신을 찾는 합리적 동물로 규정할 때 이 신학적 규정 방식이 실제로는 하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성이 신 존재를 함축하는지 안 하는지는 서구 사상사에서도 무척이나 오래된 논쟁이다. 2는 결국 특정 시기 혹은 특정 문화권에서 인정된 신학 이론이 과학의 한계를 결정할 수밖에 없음을 함축하며, 19세기 계몽주의 물결이 지나간 이후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2를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3은 어떠한가? 3은 신을 찾는 인간을 모든 것이 지향해야 할 어떤 것으로 가정해도, 실제 구체적으로 그렇게 규정하는 방식은 시대별 신학적 해석과 다른 분야, 실례로 과학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지금 꽤 지지자가 많다. 특히 근본주의 및 원리주의에 맞서 아가페적 사랑을 지향하기 위해 제한적 낙태 허용론을 펼친 많은 신학자들이 3을 지지했으며, 이들 신학자들이 현대 실천윤리(practical ethics)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네가 신을 믿는 과학자라고 하자. 위 1-3중에서 어느 것을 택해도 좋다. 다른 무신론자인 과학자의 입장도 궁극적으로는 신을 찾는 인간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고 너는 믿는다. 그 무신론자인 과학자가 신을 경명해도 너는 그의 경멸이 단지 습관의 산물 정도로 여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가 신을 믿는 행위가 너의 과학 작업에 이상이 될지언정, 결코 신 자체가 과학 작업의 직접적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 세력들이 추구하는 복음주의는 어떠한가. 우선 한국형 복음주의가 신학의 일반적 복음주의 처럼 신을 찾는 것을 인간 본질로 전제한다고 하자. 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교회도 별 반대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인간 본질이 그렇다는 데서 선교 활동의 당위성이 찾아진다면, 어떻게 선교 활동을 펼칠 것인가? 한국형 복음주의는 교세 확장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해 처먹는다.락 음악의 동원, 간증과 집단 환각 비슷한 것에 의한 눈물과 박수 세레모니, 등등!

좋다. 구복신앙이 현실세계에서 없어질 수도 그리고 없앨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고 또 그러한 방법에 의해 신도들이 선행을 한다면 그만이다. 문제는 자기 입장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하거나 자기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온누리 교회 등이 지향하는 복음주의이며, 이러한 복음주의는 정통 신학에서 볼 때 이단이다. 온누리 교회의 복음주의는 급기야 과학이 기독교와 양립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 교리, 그것도 성서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준다는 창조과학을 적극 지지한다.

창조과학이 정말 과학이라면, 신학도 필요 없고 사실 교회도 필요 없다. 세상사 모두가 신을 증명하는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기 때문에, 별 다른 선교 활동도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신의 섭리가 세상사에 명백히 베어있음에도 나와 같은 무신론자가 존재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현명하겠지만, 온누리 교회와 같은 곳에는 그럴만한 지적인 목사는 없을 것이다. 온누리 교회 세력의 입장은 과학과 신학의 진행형 대화 과정을 통해 인간 본질을 규명하려는 정통 복음주의와 다르다. 후자는 세계이해의 측면에서 과학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완전한 일치가 힘들다고 보는 반면, 온누리 교회 세력의 입장은 그 일치가 벌써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란다. 문제는 실제 과학적 발견에 등장하는 측정량과 신을 연결시켜 줄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온누리 교회 세력은 논리적 비약과 감성 자극을 이용해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며, 교세 확장을 위해 갖가지 선동과 부흥회 이벤트를 진행한다.

네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라고 하자. 네가 아무리 과학적 업적에서 뛰어날지라도, 네가 진정으로 과학자의 소양을 갖췄다면, 너는 온누리 교회의 교세 확장 이벤트에 도움을 줘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네가 추구하는 과학을 부정하는 꼴이다. 온누리 교회 사이트를 보라. 창조과학 후원회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 네가 거기 이벤트에 참가하는 것은 결국 너의 의도와 상관 없이 그 후원 작업을 돕는 꼴이다. 이 정도도 판단 불가능하다면, 네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평가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던가, 아니면 제3자의 눈총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전부 이상한 복음주의에 미쳤다면, 차라리 집에서 조용히 믿는 편이 낫다. 아니면 창조과학이 옳다고 믿게 되어서 앞으로 온누리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솔직하다.

이런 일이 유독 미국과 한국에서 자주 발생한다. 그 원인이야 뻔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과학과 한국의 과학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하다 못해 미국에는 그나마 잘못된 종교세력을 비판하는 과학자 및 인문학자들의 공식 기관이 여러 곳이다. 우리는 전혀 아니다. 이번 미국에서 창조과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하려는 노력이 법정에서 패했다. 만약 승리했다면 우리에게 끼쳤을 파급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당장 빗나간, 곧 교세 확장에 눈이 어두워 신학의 역사조차 모르는 여러 교회 세력이 미국을 운운하며 창조과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하자는 운동을 벌일 것이다. 이에 대해 반발할 기존 과학계와 학계의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존경 받는 과학자인 최재천 교수 같은 이가 온누리 이벤트 사업에 참석한다면, 불보듯 뻔하다.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부 아리송한 '화해'와 '공존'을 외치겠지! 사실 몇 대학에 벌써 창조과학관이라는 회괴망칙한 건물 공사가 추진 중인데도, 어찌된 노릇인지 모두 침묵한다. 우리보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쟁 역사가 오래된 곳에서 소위 지식인들이 대학에 창조과학관이 들어서는 세태에 대해 침묵할 것 같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화해의 적인가? 아니다. 무릇 화해란 화해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제 시작이며, 이 점에서 유명 과학자의 행동은 다른 곳보다 공적 책임이 더 크다. 이 책임론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뭘 믿던 상관 없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는 수단과 방법의 선택은 절대 아니다.
by 취어생 | 2005/10/21 11:24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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