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1일
상식의 리듬 (프로파간다 버젼)
원문: 상식의 리듬 (프로파간다 버젼)

Rhythm of Common Sense - A Propaganda Version -

누구나 당연시 여기는 행위 지침서에서 사물의 분류에 이르기 까지 ‘상식’(common sense)은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행위가 문화적 관습에 좌우되고 사물의 분류가 언어의 문법적 구조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모든 시대 및 문화에 공통된 어떤 것으로 상식을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상투적이다. 인간 사회가 동질화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할 수 없는 한에서, 그렇게 강한 공통성을 전제하는 상식은 비상식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유사성에 근거해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우리가 공감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비상식적이다. 여기에는 ‘상식’이 삶에서 당연한 것들로 구성된 일종의 일상적 공감대라는 관점이 깔려있다. 불과 100년 전만해도 인간이 달나라에 갈 수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걸어서 달나라에 갈 수 없다는 데 이의를 걸 사람은 없다. 다양한 어족에 담김 존재론적 범주 구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과나무가 인간이 없어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공동체 삶의 기반으로서 일상적 공감대를 상식으로 본다면, 세계이해의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당연한 것들이 상식에 베어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은 그러한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는 사실 속에 반영된다. 상식을 세계이해 및 가치체계의 평가 근거로 볼 수 있다는 관점도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상식이 어떻게 서로 비정합적인 다양한 세계이해 및 가치체계와 연결 가능한지는 자연스러운 의심과 부자연스러운 의심의 구분에 의해 충분히 대답될 수 없다. 상식에 대한 접근법 자체가 담론의 주제로 떠오른다. 상식을 접근할 때 피해야 할 세 가지 관점이 있는데, 이는 상식에 대한 전통적인 두 접근법에서 발견된다. 상식의 원리주의 관점, 고정된 상식의 관점 그리고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이분법 관점이 그 세 가지다. 이 세 가지 관점은 다양한 세계이해 및 가체체계와 결합할 수 있는 일상적 공감대로서 상식의 지위를 붕괴시킨다.

상식을 접근하는 전통적인 두 접근법은 이렇다. 첫째, 상식의 형성 기원 및 성질을 논하는 접근법이다. 둘째, 상식을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확실한 믿음들 혹은 의심의 영역에서 벗어난 참인 명제들의 모임으로 보는 접근법이 있다. 첫째 접근법과 관련해 상식의 형성 기원을 인지적 측면에서 따지는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감각 작용을 통해 공동체 삶의 기반인 상식이 형성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인지적 측면에서 상식의 접근법은 논외로 할 것이다. 첫째 접근법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상식을 마음의 성질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어떤 실체로서 여길 당위성은 없다. 행위와 사고의 심리적 구조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마음을 은유적으로 이해한다면, 첫째 접근법은 동서고금을 통해 자주 나타난다. 둘째 접근법을 무시한 첫째 접근법의 맹점은 마음을 우주론 혹은 성령론 같은 것에 호소함으로써 상식의 실제적인 기능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상 이러이러한 짓은 비상식적이라는 결론은 화두에 지나지 않으며, 상식은 예외 사례를 허락하지 않는 마음의 본질로 전락하고 만다. 일상경험을 바탕으로 무엇이 마음의 본질인지 그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

둘째 접근법은 상식의 방어와 관련해 무어(G.E. Moore) 이후 언어 및 분석철학 진영에서 암묵적으로 사용된 방법이다. 그러나 그 진영에서 상식은 하나의 무모순한 정합적인 체계로 취급되었고, 상식의 방어라는 것은 실제로는 특정 존재론(ontology), 실례로 관념론(idealism)을 부정하기 위해 상식을 도용한 것이다. 내가 없어도 나무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믿음은 결코 특정 존재론의 확실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상식이 철학 이론의 부분적 건전성을 평가하는 출발점일 수는 있으나, 이로부터 상식이 한 번에 유일한 체계적 세계이해로서 특정 철학적 이론을 결정해준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일부 철학자들은 일상경험에 비추어 참 거짓 판단 가능한 믿음의 의미를 명제로 규정할 때 대상과 속성의 존재론적 구분을 마치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명제의 논리적 구조, 곧 주어와 서술어의 구조에 따라 주어에 들어가는 것은 대상들이며, 서술어의 의미는 대상에 부여되는 속성이라는 존재론이 당연하다면, 이 당연성은 단지 그 존재론을 깔고 있는 인도유럽어족에만 그러할 뿐이다. 세상을 분화 과정으로 보는 존재론 혹은 일상적 대상의 배후에 유기적인 전체를 포진시키는 것이 비상식적이라면, 이러한 결론은 다양한 세계이해 및 가체체계와 연결 가능한 상식의 유연성을 죽이는 짓이다. 이 짓거리는 특정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식을 도용한 것에 불과하며, 또 공동체 삶의 기반으로서 일상적 공감대를 독단 속에서 파악한 것에 불과하다.

상식에 대한 두 접근법을 분리해 볼 필요는 없다. 일상적으로 당연한 것들이 행위와 사고의 심리적 구조 속에 반영되고, 또 역으로 그러한 구조가 일상적 믿음체계의 형성에 제한을 가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첫째와 둘째 접근법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당연한 것들은 절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공시적 그리고 통시적으로 역동적 체계(dynamic system)를 형성한다. 일상적 공감대로서 상식은 그러한 역동적 믿음체계 속에서도 구조적 유사성을 또한 가짐으로써 다원화된 세계이해와 가치체계의 탄력적 기반으로 봉사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 공감대로서 상식의 심리적 구조는 공시적 그리고 통시적으로 구조적 유사성(structural similarity)을 갖는다. 당연한 믿음들은 실재론적으로 순응되어 있다. 그 누구도 일상생활에서 지각경험의 대상이 머리 혹은 마음에 들어있다고 믿지 않으며, 이러한 믿음의 당연성은 합리적 정당화의 맥락에서 고려될 것이 아니다. 당연한 믿음들은 서로 서로 돕는 상보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공동체 삶의 체계를 이루며, 이 체계는 일상적 실재론이란 관점을 축으로 형성된다. 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행위 지침의 관점들이 그 체계 속에 반영된다. 심리적 구조로서 상식은 이러한 관점들을 분유하는 데 유사성을 갖는다. 또 믿음체계로서 상식 속에 그러한 관점들이 반영된다. 상식의 첫째 접근법과 관련된 구조적 유사성은 상식의 둘째 접근법과 관련된 당연한 믿음체계의 역동성을 허락한다. 일상적 실재론의 관점과 양립 가능한 믿음들은 시대의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표출된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관점은 어떤 경우에 사람을 죽여도 되는지를 막 바로 함축하지 않는다. 그 관점은 환경 속에서 다양한 믿음들로 표출된다.

상식의 첫째와 둘째 접근법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인정할 때 하나의 세계이해 및 가치관은 상식에 의해 제한된 하나의 설명체계다. 당연한 것들은 자체의 당연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들의 원인을 찾고 당연한 것들과 양립 가능한 설명체계는 다원적이다. 어떤 세계이해 혹은 가치체계가 궁극적으로 올바른지를 상식 자체에 근거해 판단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상식의 당연한 믿음들 전체를 정합적으로 설명해주는 세계이해나 가치체계를 추구하는 것 또한 환영이다. 모든 세계이해 및 가치체계는 상식과 부분적으로 양립 가능할 뿐이며, 그래서 상식은 그것의 어떤 측면이 그렇고 어떤 측면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부분적 평가 기반으로 봉사한다. 우리가 상식을 존중한다면, 상식을 원리화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상식 자체를 왜곡시켜 죽이는 짓이다. 또 단 하나의 올바른 세계이해 혹은 가치체계를 추구하는 것은 상식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상식이 철학에 그은 운명적 한계이며, 이 한계를 경멸하는 모든 철학자들은 병적인 인간들이다. 그들은 완성할 수 없는 바벨탑을 쌓으려는 자와 같다.
by 취어생 | 2005/10/21 11:25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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