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1일
자연에서 색의 지위에 관한 고백
원문: 자연에서 색의 지위에 관한 고백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온갖 소리와 색으로 가득 찬 공간의 주인이 된다. 그 공간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시각의 방'(visual room)이자 '소리의 방'(sound room)이다. 소리와 색이 있는 곳에 대상이 있기에, 색과 소리는 지각경험에서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단지 개념적으로 색, 소리 및 형태를 대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세상을 추상화하고 역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보고 듣는 지각경험 그 자체에서 그러한 분리는 없다. 색과 소리에 대한 개념은 머릿속에 있을지 모르지만, 소리와 색 그 자체는 대상과 함께 분명히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색과 소리의 인식은 주인을 갖는다. 그 주인, 실례로 인간이 없다면, 색과 소리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점에서 색과 소리의 인식은 주관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런데 인식의 주관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해서 색과 소리 자체가 순수한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색과 소리가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라면, 그것은 분명히 자연을 설명하는 데 어떤 역할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서양철학과 과학을 탐구하면 할수록 색과 소리는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혹은 두뇌가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현상으로 여기게끔 된다. 이와 관련해 인도를 제외한 동양사유에 이질적인 관념(ideas), 감각인상(sense impressions), 정신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 등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개념의 등장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철학과 과학의 중요 개념이란 역사와 문화라는 문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둘 다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에 일치한다.

일상생활에서 살은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을 구제하기 위해 동원되는 가설은 다양하며 역사와 문화의 문맥에 의존한다. 색과 소리가 자연에서 실재(reality)의 지위를 잃어버린 사실은 오로지 서양의 고유한 세계이해와 관련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중심 없는 우주의 탄생과 함께 자연에 적용되는 법칙은 우주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한다는 등질적 자연관을 낳았다. 그러한 등질적 자연관의 등장은 잊혀진 원자론의 부활을 예고했고, 원자론은 17세기 근대 과학혁명 이후 입자론(corpuscular theory of matter)으로 탈바꿈했다. 이 탈바꿈에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한 이는 갈릴레이였다. 죽은 모든 것이 입자로 이루어져있다면, 입자가 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기본 단위라면, 경험하기 이전의 세상의 원래 모습, 곧 물질계에 색과 소리가 들어갈 구석은 남아있지 않다. 경험 이전의 세상은 색과 소리 등이 빠졌다는 점에서 '검은 세계'(dark world)에 비유된다.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의 몸(body)이 또한 물질로 구성되어있다면, 원래의 몸 자체에는 색과 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입자들의 인과적 관계와 운동 등만이 있을 뿐이다. 자연의 탐구에서 수컷들이 화려한 색으로 암컷을 꼬시는 행위 따위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색과 소리가 위치할 장소로서 실재인 자연이 아니라 또 다른 곳, 곧 마음이라는 물질과 다른 실체가 가정되었다. 물질과 마음을 분리한 이원론적 실체론(substance dualism)에서 외부 대상에 대한 직접적 지향성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학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보기 이전의 외부 대상이 마음 속에서 관념화된다는 '대상의 관념화'(things into ideas)라는 은유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 자체가 관념이라는 '관념의 대상화'(ideas into things)라는 은유로 대표되는 두 학설이 그 실례이다.

데카르트 및 아르노 등에 기인한 '대상의 관념화'라는 은유에 바탕을 둔 학설에 따르면, 오로지 외부 대상의 연장(extension)적 속성만이 마음에 있는 그대로 전파될 뿐 색과 소리는 물질에 동요된 마음이 만들어낸 2차적인 것이다. 그러한 2차적인 것은 사물의 원 모습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에 과학적 혹은 객관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말브랑쉐, 버클리, 흄 등에 기인한 '관념의 대상화'라는 은유에 바탕을 둔 학설에 따르면, 경험 이전의 세상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경험하는 것 자체가 대상이라면, 이원론의 사유틀 속에서는 실체와 분리된 경험을 탈출할 수 없음이 논리적으로 뒤따른다. 이는 물질에 관한 지식, 곧 객관적인 과학적 지식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칸트가 그러한 지식을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마음의 조건과 결부시켰다고는 하지만, 그의 시도는 우리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연의 존재를 거부한다. 경험 이전의 자연의 모습이 단지 이성에 의해 요청될 뿐이라면, 신 또한 그렇다.

과학은 점점 발달했고, 이와 함께 세상을 설명하는 데 신의 역할은 점차 제거되었다. 여기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은 것과 죽은 것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밝혀진 것이 큰 공헌을 했다. 과학은 소리와 색의 객관적 원인으로서 파장 및 인체 기관의 역할을 밝혀냈다. 그러나 소리와 색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색과 소리가 실재하는 것으로 자연에 있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시공간적 크기를 갖는 실재와 다른 차원의 현상일 뿐이다. 이점은 서양의 세계이해 속에서 자연스럽게 예술과 과학을 분리시키는 계기가 된다. 괴테는 일상경험을 바탕으로 외부대상의 일면으로서 색을 자연의 실재로 위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색체론(Farbenlehre)은 과학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헬름홀츠는 괴테가 너무 시인의 눈으로 자연을 관찰했다고 평했다. 자연의 실재를 추적하기 위해 색과 소리로 가득 찬 경험을 벗어나 그것의 객관적 원인에 관심을 두어야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 전제에는 서양의 일반적인 세계이해의 특징인 실체와 경험을 분리하는 자연관이 함축되어 있다.

경험 이전의 세상, 곧 물질적 실체에서 경험을 분리할 때 그리고 그 경험의 장소로서 마음이라는 실체와 신을 제거할 때 자연의 실재는 등질적인 물질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 속에서 색과 소리가 존재론적으로 자리잡을 곳이란 없다. 콰인 등으로 대표되는 분석철학의 일원론에서 자연은 그냥 물리적인 것과 동일하며, 그 일원론은 전통적인 이원론에서 마음이라는 실체를 제거하고 신을 자연과학으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속칭 현대 물리주의자의 이상적인 과학은 물리학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원론에 반대하여 나타난 물리주의와는 다른 여러 사유방식이 있었듯, 서양과학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지나치게 인식론과 몸과 마음의 문제에 매달린 현대 철학자들, 특히 분석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무지하거나 망각하고 있다.

자연에서 색과 소리의 역할은 진화론의 다윈과 집단 유전학(population genetics)의 아버지인 멘델에 의해 강조되었다. 해부되지 않은 '온전한 유기체'(intact organisms)의 색과 같은 특성(characters)은 개체의 생존과 증식에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진화론에서 인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유전형(genotype)에서 표현형(phenotype)으로 드러나는 과정에 기계론적 결정과정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색이 종의 유지와 확장에 적합성(fitness)을 갖는다는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미래를 결정해주는 보편적인 결정론적 자연법칙이 진화의 역사까지도 포섭하는 것은 아니며, 유기체의 색의 환경적응은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또한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환경적 적소(niche)와 함께 유기체의 색과 소리를 고려하는 생태학적 사유방식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전체 혹은 단절되지 않은 실재로서 자연을 중시한다. 진화론과 생태학을 진정한 자연과학의 분과로 인정할 때 자연에서 색과 소리의 역할은 무시될 수 없다. 이 두 학문은 이러한 점에서 기존의 자연과학과 다르며, 실제 이 두 학문이 진정한 자연과학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이를 반영한다.

색과 소리를 자연에 실재하는 일부로서 파악하고 자연에서 그것들의 역할을 인정할 때 죽은 것과 살은 것 혹은 물질과 유기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요구된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이 요구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란 자연에서 색의 역할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동아시아 사유구조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점은 철학의 역사 문화적 문맥 의존성을 반영한다. 프랑스 철학교육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그러한 철학교육은 당사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철학은 역사에 종속되거나 상대주의만이 살아남을 대안일까.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미루더라도, 한 가지 인정해야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비슷한 일상경험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을 해석하는 방식에는 집단적 차이가 있다. 소위 강대국으로 불리는 권력의 중심부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주변부에서는 무시될 수 없다. 권력의 약한 주변부가 세계이해의 차이 문제를 무시한다면, 그 주변부는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포기하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포기의 길로 빠진 것 같다.
by 취어생 | 2005/10/21 11:28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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