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1일
힘 개념, 동과 서 (추후에 氣론을 섞어 논문으로 확장 될 글)
원문: 힘 개념, 동과 서 (추후에 氣론을 섞어 논문으로 확장 될 글), 아랫글이 잘렸으므로 반드시 원문을 읽을 것!!

힘이라는 용어의 일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아마 크게 두 가지 사용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생물체에 적용될 때 자생력 혹은 일을 할 수 있는 원천을, 둘째 죽은 당구공과 같은 물체에 사용될 때 외부에서 받은 운동 능력을 뜻한다. 이러한 힘의 의미는 다양한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힘 개념을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해석할 때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문화에선 힘을 종종 기(氣) 개념으로 다루지만, 그 개념이 다른 문화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서양과학 및 철학 전통에서 이해된 힘 개념과 기 개념 사이에 어떠한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가? 이러한 문제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의 규명 문제로 이어진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곧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 글에선 회피하겠지만, 오늘날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에서 세계관의 차이규명이 중요한 이유를 언급하려고 한다. 우선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에서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여러 세계관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세계관을 형성하는 깊은 관점은 경험에 의해 검증 및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이다. 전통적으로 다양한 형이상학의 관점이 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종종 스캔들로 여겨져 왔다. 그 여러 원인 중 사회적 원인으로서,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역사에서 다원화된 세계이해란 항상 불쾌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심부를 간단히 자국어로 쓰여진 것이 번역의 필요 없이 주변부에 강력한 확산 효과를 갖는 지역이라고 하자. 중심부의 과학기술과 문화에 의해 지배를 받는 주변부에 있어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설명하는데, 자신의 세계관 흐름의 역사에 대한 비교 문화적 고찰은 중요하다.

힘에 대한 동서양 비교는 분명히 양자의 세계관 차이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하지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과거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이해서 읽어야할 양은 오늘날에 비해 극히 작다. 그 대신 하나의 전문가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기 쉬운 장점이 있다. 오늘날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신학자와 물리학자가 자연에 대해 섬세한 토론을 주고받기란 더 이상 힘들다. 결국 현대 전문가는 자신의 전공영역을 뛰어넘기 힘들다. 따라서 기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나의 한계 바깥에 있다. 그 대신 몇 가지 은유적인 물음을 통해 서양 힘 개념의 중요한 핵심 사항을 추적한다. 그러한 핵심 사항이 힘 개념에 대한 동서양의 세계관 차이를 연구하는데 검토기준으로 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첫째 물음은 다음이다.


첫째 물음: 네가 만약 신이라면?


자연에 대한 이해가 구체적으로 수학적, 특히 기하학적 방법에 의해 표현되기 시작한 17세기 과학혁명기에서 시작해보자. 그 당시 세계관은 이원론으로 대표된다.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그 추진력을 얻은 이원론은 물질의 성질은 오로지 물질의 속성에 의해서 그리고 정신의 성질은 오로지 마음의 속성에 의해서만이 설명됨을 말한다. 따라서 데카르트(R. Decartes 1596-1650) 및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 등은 이원론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이원론이라는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든 인물들이다.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실체는 신이며, 신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서로 독립적인 두 실체가 바로 물질과 마음이다. 물질에 의해 동요된 마음은 경험이 발생하는 동시에 이성과 도덕성의 원천으로 자유의지(free will)가 자리잡는 장소이다. 물론 그 장소는 물질과 달리 공간적인 크기로서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을 갖지 않는다. 물질은 원래 중세시대 플라톤적인 형상을 부여받는 주형체(matrix)로 이해되다가, 과학혁명 시기엔 연장 없는 물질개념은 거부되었다. 자연철학 혹은 그 당시 자연과학은 철저히 물질의 속성과 관련되어야하며, 정신의 문제와 윤리학이 그곳에 기댈 기둥은 없다. 이러한 이원론의 세계관에서 0물질과 관련된 힘은 마음의 그 어떤 성질과도 무관하다. 이원론이 동양사유에 이질적이라고 할 때 비교철학에서 중요한 하나의 검토기준을 얻는다:


1. 이원론에서 물질에 적용되는 힘은 오로지 물질과 관련된다. 이원론이 동양사유에 이질적이라면, 물질에 국한된 힘은 분명히 기와 다르다.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정확히 나는가?


여기서 구체적이고 세밀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다. 분명한 점은 기는 물질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검토기준 1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하기 위해선 과연 그러한 힘이 무엇인가를 물어야한다. 힘없이 물질의 활동 또한 없다면, 그러한 활동성의 원천으로서 힘은 어디서 오는가. 당연히 이원론의 관점에선 신이다. 그렇다면 신은 어떠한 방식으로 물질을 움직이게 했을까? 그는 도대체 어떠한 식으로 당구공을 움직이게 했을까?

만약 신이 물질계를 거대한 시계처럼 창조했다고 해보자. 시계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배터리가 없다면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배터리는 시계 스스로 활동할 수 있게끔 해주는 시계 자체의 고유한 힘이 아니다. 배터리가 공급하는 힘이란 시계가 설계된 방식에 따라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끔 해주는 수동적인 힘이다. 곧 외부에서 도입된 힘이다. 수동적인 힘은 소멸되며, 재충전이 필요하다. 그러한 수동적인 힘은 이원론에선 관성(inertia)으로 표현된다. 곧 물질로 이루어진 물체에 신이 태초에 부여한 힘으로서 관성이란 물체의 상태유지와 관련된 수동적 힘이다. 외부의 방해가 없다면, 물체는 정지 혹은 원래의 운동상태를 계속 유지한다. 관성이란 단어가 수입된 후 일상생활에서 종종 추진력을 뜻하지만, 그러한 사용법은 원래 관성 개념에선 허락될 수 없다.

과학혁명기의 물리학 수식에 나타나듯이, 물체의 운동경로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신이 전지 전능하더라도, 물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두 물체가 충돌할 때 관성은 저항으로 작용하며, 서서히 그 힘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물질의 관성이 그 운명을 다하면, 신은 다시 그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재충전을 한다. 실제 뉴턴(I. Newton 1642-1727)에게 있어서 시공간이란 신이 적절한 시기에 우주에 개입하기 위한 중추기관(solarium)과 같다.

여기서 철학적으로 두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도대체 질량 곱하기 가속도로 나타나는 뉴턴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 힘은 충돌 시 저항에 반해 발생하는 외압(pressure)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뉴턴은 철학적으로 중력을 진정한 힘으로 보지 않았다. 중력이 진정한 힘이라면, 원거리에서 상대 물체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쳐야한다. 그럴 때 중력이 물체 자체의 속성이라면, 그것은 관성과는 달리 물체 자체에 고유할뿐더러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중력은 분명히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력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철저히 기계적으로 파악했던 뉴턴에게 있어서 중력은 죽을 때까지 커다란 골칫거리로 남았다.

둘째 문제는 뉴턴에게 기본적인 역학적 관점을 제공한 데카르트와 관련된다. 그 관점에 따르면, 모든 운동의 변화는 오로지 접촉, 곧 충돌에 의해 발생하고 그 과정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완전히 표현 가능하다. 뉴턴에게 보존되는 양이란 오로지 물질량, 곧 질량(mass)인데 반해, 데카르트는 관성 이외에 충돌 중 교환되는 또 다른 힘을 인정한다. 오늘날 관점에서 그 힘은 질량 곱하기 속도로 표현되는 운동량이다. 그렇다면 운동이 보존되는 한에서, 신이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데카르트 자신이 진정 능동적인 의미에서 힘을 파악한 명백한 증거는 없다. 혹자는 그러한 보존 자체를 신의 속성으로 돌리기도 하고, 또는 데카르트 철학 자체를 비정합적으로 보기도 한다.

힘의 전파를 오로지 물체의 접촉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이원론의 역학적 세계관은 상당 기간 그 위세를 유지했다. 중력의 경우, 뉴턴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진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물체 사이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에테르라는 순수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원거리 작용은 사실 한 물체의 외압이 에테르를 통해 다른 물체에 전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에테르의 도입은 단순히 물리학의 측면이 아니라 철학적인 면에서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에테르의 도입은 물체를 이루는 물질의 종류가 하나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테르 가설이 20세기 초까지 살아남은 데는 다른 것에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영향을 미쳤다. 뉴턴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물체에 내재하는 활동력, 곧 운동에너지의 존재가 일반적으로 인정되었지만, 그러한 활동력 또한 다른 것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영향력은 아니다. 실례로 맥스웰(J.C. Maxwell 1831-1879)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포함한 모든 원거리 작용을 에테르의 진동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최소한 그의 전자기학은 에테르의 가정 없이도 잘 적용되는데 말이다.

타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영향력의 존재는 현대에도 여전히 골칫거리임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에서 에테르의 존재를 날려버린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 때문이다. 물론 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중력의 문제가 어느 정도 풀렸다고는 하지만, 사실 물체에 고유한 영향력으로서 중력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물체의 물질량 곧 질량에 의한 공간의 왜곡현상이 중력의 결정적인 원인인 한에서, 중력은 본질적으로 공간 곡률과 4차원 상의 운동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스스로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 영향력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 기타 핵력 등 미시세계에서 발견되는 힘 또한 입자의 교환작용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가 대세이다.

여기서 물질의 운동과 관련해 수동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 변화 과정에서 가장 극단적인 양끝을 가정하자. 이 경우 가장 수동적인 세계관은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이고, 다른 끝은 가장 능동적인 세계관일 것이다. 아직 그 다른 끝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다른 끝은 없을지도 모른다. 뉴턴 이후 물질에 내재하는 활동력으로서 힘이 점차 물리학에서도 인정되게 되지만, 그 활동력은 운동과 연관되지 결코 타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은 아니다.

어쨌든 물질계를 기계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힘은 자생력, 스스로 움직이는 힘 혹은 물질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힘을 뜻할 수 없다. 검토기준 1과 관련된 세부 물음은 다음이다:


1.1 이원론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물질의 힘은 기와 어떤 차이가 나는가?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물질의 힘이란 물질에만 국한되고 수동적인 반면에, 기는 그렇지 않다. 기에 대한 학문적 수양이 없더라도, 동양에서 성장한 사람은 누구나 이 차이를 쉽게 공감할 것이다. 또한 그 세계관에선 타자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힘은 다른 것에 직접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 과연 기 개념은 어떠한가? 이 물음은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둘째 물음: 힘이 실체라면?


과연 17세기에 모든 이가 데카르트와 뉴턴처럼 생각했을까? 이원론에선 활동력이 들어갈 틈이 없는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식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을 진지하게 다룬 형이상학자는 물론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이다. 라이프니츠는 힘이 보존량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고수했다. 만약 힘이 활동력이면서 보존량이라면, 신이 물질을 창조한 후 다시 이 세상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라이프니츠는 호이겐스(C. Huygens 1629-1695)의 발견 덕택으로 활동력, 곧 살은 힘(vis viva)은 결코 운동량으로 표현될 수 없음을 확신하게된다. 만약 운동 중 전파되는 힘이 질량 곱하기 속도로 표현되는 운동량이라면, 즉시 운동량 보존법칙은 깨어진다.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운동 에너지를 진실 된 살은 힘으로 보았고, 사실 그 발견은 이미 갈릴레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연 활동력이 어떻게 물질 속에 내재할 수 있을까? 다른 이원론자와 마찬가지로 물질의 수동성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활동성의 궁극적인 원인을 신으로 파악한 라이프니츠에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아마도 신이 물질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 경우 물질의 활동력은 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다. 우리는 실체로서 힘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둘째 검토기준을 만나게 된다:


2. 실체로서 힘과 기의 차이란 무엇인가?


단 하나의 실체로서 힘이 가정된다면, 모든 물질 현상 및 정신 현상이 힘의 활동성의 산물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실체로서 힘이야말로 활동성 그 자체로서 기에 대응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큰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 장벽이란 다름 아닌 서양 전통의 실체 개념이다.

실체란 다른 것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물질 및 정신 현상의 기원을 신에서 찾을 때 그 현상은 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반면에 신 없는 물질과 마음은 생각 조차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불변하고 절대적이며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서양 모든 개념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선, 진리 그리고 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진선미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대비되는 악, 거짓과 추함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이 악하고, 거짓이고 추하다고 할 때 그것은 절대적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진선미에 대비하여 이해된다. 반면에 악함, 거짓 그리고 추함이 가정되지 않아도, 진선미는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한다. 스스로 존재하며 비교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이러한 실체 개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미 개념이 실체로서 이해될 때 미란 단순히 주관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 자체와 취미 및 해석과 연관된 예술 개념의 구별이 서양 전통에서 생겨났다. 진선미 일치사상은 실체 일원론의 모태로서 그리스 문화와 유대 기독교 문화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한다.

과연 동양에는 서양의 실체와 유사한 개념이 있는가? 그래햄(A.C. Graham)이 지적했듯이, 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없다. 양과 음 중 어느 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인가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서로를 보완해주는 상보성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쓸모 없는 것이 없다. 양이 비록 더 강할지라도 양이 없으면 음이 없고 음이 없으면 양이 없다. 여기서 인간 경험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서양 실체 개념의 윤곽이 더욱더 명백해진다. 이원론에서 신을 고려하지 않을 때 실체는 물질과 마음이다. 경험이란 물질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난다. 경험이 없어도 실체로서 물질과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경험은 그렇지 않다. 마음의 요소가 경험에 개입하는 한에서, 실제 물질의 모습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경험은 사실 물질과 마음이라는 실체의 부산물이지 결코 실체와 연결된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 바로 이점이 실체와 경험을 분리하는 사유도식이며, 이러한 사유도식은 동양의 사유전통에선 이질적이다.

실체로부터 경험을 분리하는 사유도식의 결과로서 어느 정도까지 경험이 세상의 원래 모습을 반영하는가 라는 거대 담론이 탄생하였고, 이와 관련해 합리론, 경험론 그리고 선험성 등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경험이 물질의 시공간적 크기와 관련된 연장적 속성을 반영하며 순수 사유에 의해 그 속성을 알 수 있다는 합리론, 그렇지 않다는 경험론 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과학적 지식, 곧 객관적인 지식이란 물질의 속성이 아니라 바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마음의 타고난 조건과 관련된다는 관점, 이 모두가 사실 경험이 단지 실체의 반영일 뿐이라는 사유도식 틀 안에서 맴돈 것이다.

물론 현대 서양철학에서 물리주의 혹은 일원론이 대세라곤 하지만, 절대 근세 사유도식의 틀을 탈피한 것은 아니다. 현대에서도 경험의 가장 큰 특징인 소리와 색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대상 혹은 물건처럼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 사실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소리와 색을 단순히 뇌의 생리학적 작용으로 본다는 점에서 명백해진다. 오늘날 다수의 철학자들이 마음이란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뿐 여전히 실체와 경험 사이의 분리 사유도식, 곧 경험이란 단지 실체를 반영하거나 혹은 물리적 과정에 의해 얻어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관점은 살아있다. 서양에선 여전히 소리와 대상은 나무와 같이 공적(public)인 외부대상이 될 수 없다. 정말이지 서양 현대 사유가 근세로부터 결별했다고 주장하는 이를 보면, 그가 어디서 공부했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얼마나 유명한지와는 상관없이 한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동양철학에 대한 나의 얄팍한 지식에 의하면, 동양에선 소리와 색을 마치 외부 대상처럼 취급하였다. 소리를 담는다와 같은 표현은 절대 전문 서양철학 글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경험론 전통에서, 특히 흄(D. Hume 1711-1776)과 같은 이들이 경험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나무와 같은 대상과 동일시하였다. 하지만 그 때 대상이란 물질에 의해 촉발되어 마음에 나타난 관념들(idea)일 뿐이다. 관념으로서 대상이라는 관점이 인도, 특히 초기 원시불교에 등장하긴 하지만, 우리와 일본 및 중국의 전통에선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험 자체가 기의 활동성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이지 기 활동의 부산물 혹은 현상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나의 경험 이전의 세상 혹은 실체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은 기 개념 하에선 무의미하다. 사물들이 사라질 때 실체로서 남게되는 기란 없다. 그렇게 남기 위해선 논리적으로 기의 활동성과 그 결과를 분리해야하는데, 이러한 식으로 기가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다시 만약 힘이 실체라면이라는 원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신이 활동의 궁극적인 작용인이라면, 힘으로서 실체는 신 그 자체이다. 실체의 개념에 의해 모든 것이 사라져도 힘은 남게된다. 따라서 실체로서 진짜 힘은 물질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결국 실체인 원초적인 힘(vis primitiva)을 가정하였고, 시공간적 크기, 곧 연장을 갖는 물질에 내재한 듯이 나타나는 살은 힘은 원초적인 힘으로부터 유도된 힘(vis derivativa), 다시 말해 2차 적인 힘이다. 실체로서 힘 개념은 결국 1차적인 진짜 힘과 그것의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의 구별을 나았고, 이러한 구별은 기 개념엔 해당하지 않는다. 기는 결코 실체로서 힘에 대응하지 않는다.


셋째 물음: 힘의 종류는 몇 개인가?


궁극적인 실체로서 힘을 가정할 때 그 힘의 영향력을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점에선 기 개념과 일맥상통하나, 실체로서 힘 개념이 기 개념과 상응할 수 없음을 보았다. 실체로서 힘 개념의 가장 큰 난제는 형체 혹은 연장이 없는 힘이 어떻게 형체 혹은 연장을 갖는 물질적 실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베르누이(J. Bernoulli 1667-1748) 등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의해 이 난제가 결코 풀릴 수 없다고 믿었으며, 급기야 러셀(B. Russell 1872-1970)은 그 형이상을 실현될 수 없는 꿈으로 간주하였다. 실체로서 힘 개념을 비판하는 이는 과거나 현재나 물질을 힘 혹은 에너지보다 실체적인 것 혹은 우선하는 것으로 본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운동에너지란 개념은 라이프니츠의 활력 혹은 살은 힘으로부터 자극 받았지만, 그 개념은 실제 베르누이 등 물질 우선론자에 의해 정착되었다. 물질은 힘에 우선하는 실체이며, 힘은 물질의 운동을 위해 물체 속에 내재한다. 물질 우선론의 준칙이란 물질 없는 에너지의 존재란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세기 물질 우선론자가 말하는 힘은 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뉴턴의 힘, 곧 질량 곱하기 가속도가 아닌 오늘날 운동에너지임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결국 뉴턴의 힘과 운동을 가능케 해주는 활력으로서 힘 사이의 명백한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맥스웰은 힘을 운동하려는 성향, 에너지를 활동의 원천으로 정의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오늘날 힘은 상호작용의 방식, 곧 역학적 방식 혹은 전자기적 방식 등으로 이해되고 에너지란 그러한 상호작용을 가능케 해주는 원천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볼 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중요하진 않다. 원래 힘의 라틴어 기원인 "vis" 자체가 일의 원천이자 일하고자하는 성향 두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 실제 20세기 초 물리학자들도 힘과 에너지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종종 사용하였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힘은 일의 원천이란 의미에서 사용될 것이다.

물질 우선론자에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물질의 운동과 관련된 힘과 생명과 관련된 힘 사이의 관계이다. 그에게는 최소한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첫째 생명과 관련된 힘을 물질과 관련된 힘에 의해 환원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 두 힘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첫째 방법에 의하면, 물리학과 생물학의 갈등은 어쩔 수 없다. 적어도 18세기 중엽까지는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간단히 말해 학문으로 정착된 생물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중엽을 지나서 19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진다. 원래 물리학도였던 멘델(G.J. Mendel 1822-1884)의 입자유전 개념이 20세기 초 재발견된 후 많은 이들이 생물학을 물리학 품안에 흡수하려고 했다. 입자유전의 개념은 돌턴(J. Dalton 1766-1844)의 원자론의 영향을 받아 유전에 최소 단위를 가정한 것이고, 1906년 영국의 윌리엄 베잇슨(W. Bateson)에 의해 유전학(genetics)이란 학문용어가 제안되었다. 곧이어 소련의 유전학자 니콜라이 티모피프 레소브스키(N. Timofeef-Ressovsky)와 독일의 물리학자인 찜머(K. Zimmer)의 방사능에 의한 유전자 변이가 입증되었다. 유전의 최소 단위인 유전자 개념은 분명히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 가정된 양자(quantum) 개념과 유사하며, 방사능에 의한 유전자 변이는 생명현상이 완전히 물리학의 법칙에 종속될 것이라는 꿈을 자극했다. 드디어 20세기 중반 분자생물학이 탄생한 후 상당수의 전문가가 생명현상의 비밀이 물리학에 의해 풀릴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생물학은 이미 전통적인 유전학을 탈피하였다. 모자이크 유전 개념이 확립된 후 세포는 더 이상 각각의 유전자를 갖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생성해내는 기관이다. 그 생성 과정이 세포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와 관련된다면, 더 이상 전통적인 입자유전의 개념은 통용될 수 없다. 또한 그 관계가 현 물리학의 수준에 의해 풀릴 수 있다는 것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 설정이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다양한 생물체를 관통하고 있는 동일한 생명력이 있다는 생기론이 등장했을 때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었었다. 과연 생명체에 흐르는 힘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과연 물질적 힘과 다른 것인가? 생명력이란 단순히 신진대사와 생리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성질을 갖는가? 이러한 질문에 긍정하는 이는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둘째 방법을 택한다. 다시 말해 생명력이란 물질의 힘과는 구별되는 다른 힘이다.

여기서 던져야할 셋째 물음은 다음이다:
by 취어생 | 2005/10/21 11:53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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