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1일
Sir K. Popper on the Empirical Science (쉬운 정리 자료)
원문: Sir K. Popper on the Empirical Science (쉬운 정리 자료)


우리의 근본 관심의 대상은 경험과학이다. 그런데 도대체 경험과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등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경험하고, 생각을 통해 세상이 이러이러하다고 해석한다. 그러한 해석은 진술들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경험세계, 곧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여러 종류의 진술들의 체계로서 경험과학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경험과학을 형성하는 진술들은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실례로 한 개인이 다른 이성으로부터 얻은 느낌 등의 표현하는 진술들은 경험과학에서 배제된다. 어떤 진술이 경험적이고 동시에 과학이론에 속한다는 것은 그 진술이 경험에 의거해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인 테스트를 받을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 이러이러하다는 진술의 타당성이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허용될 수 있을 때 그 타당성은 상호주관적인 의미에서 인정되는 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오로지 나의 유일한 사랑이야"와 같은 진술은 결코 경험과학에 속할 수 없다. 그 진술을 말한 사람의 이성친구를 내가 직접 만난다는 경험에 의해, 나는 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심리적 이유를 캘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심리추적에 의해, 그 진술이 모두 동의 혹은 부정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전혀 대답될 수 없다. 그러한 진술의 타당성은 오로지 관련된 개인의 문제이다.


귀납주의(inductionism)의 한계


경험과학의 영역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어떠한 심리적 요소도 추방되어야한다. 경험과학의 이론들이란 근본적으로 경험 속에서 상호주관적인 테스트를 거칠 수 있어야한다는 점에 동의하면, 이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세 가지 질문들에 대답해야한다:


첫째, 경험적 테스트를 거칠 수 있는 진술들의 체계로서 과학이론이란 어떻게 구성되는가?

둘째, 어떠한 조건 하에 하나의 이론이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셋째, 구획(demarcation)의 문제, 곧 경험과학은 다른 분과, 특히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른가?


이 세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귀납주의의 관점을 살펴보자. 첫째 질문에 대해 귀납주의자들은 과학이론의 자연법칙이란 관측사실에 의거해 일반화된 보편진술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까마귀를 관찰한 후 추측을 통해 "모든 까마귀는 검다"와 같은 보편진술이 얻어진다. 그러한 보편진술은 데이터에 근거해 특정 종류의 대상에 일반적인 특성 혹은 성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관측사실에 의거해 보편진술을 얻는 과정, 곧 귀납적으로 타당한 보편진술을 얻는 과정을 객관화하기란 아주 힘들다. 도대체 몇 마리의 까마귀를 관찰해야하고, 관찰로부터 보편진술을 추측하는 과정의 논리적 단계와 구조란 무엇인가? 귀납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상호주관적인 의미에서 검사할 어떠한 방법론도 갖고있지 못하는 듯하다.


둘째 질문에 대해 귀납주의자들은 이론을 구성하는 진술들이 경험, 곧 관측에 의거해 검증(verification) 가능할 때 비로소 그 이론의 선택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경험 속에서 상호주관적인 테스트 가능성을 관측에 근거한 검증여부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 개는 꼬리를 갖고 있다"라는 단순진술의 진위여부는 그 개가 정말 꼬리를 갖고 있는가를 확인함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개는 꼬리를 갖고 있다"라는 보편진술은 잠정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여기서 잠정적이란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에 있을 모든 개들을 관찰할 수 없지만, 그 일반진술의 진위여부의 판단은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개들의 관찰에 근거함을 뜻한다. 자연의 법칙은 보편진술의 형태를 띠고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러한 보편진술의 진위여부를 판단은 특정 단순진술들에 좌우되게된다. 이러한 경우 귀납원리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귀납주의자들의 신념은 포기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많은 개별사실들을 관찰할지라도, 이로부터 보편화된 일반진술이 참이라는 점은 귀납원리에 의해 완전히 확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론이 받아들여질 만한가 라는 점에 대해 귀납원리가 충분조건이 될 수 없는 한에서, 귀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검증 가능성이란 둘째 문제에 아무런 대답도 제공할 수 없다.


셋째 문제에 대해서도 귀납주의자들은 여전히 관측에 근거한 검증 가능성이란 기준을 제시한다. 경험과학이 논리학과 구별되는 이유는 논리학의 진술들이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례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라는 진술을 고려해보자. 이 진술은 비가 오든 비가 오지 않든 어떤 경우에나 참인 동어반복(tautology)이다. 논리학의 진술인 동어반복들은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어떠한 경험적 사실에 의해서도 검증 혹은 반증될 수 없다. 형이상의 모든 진술들 또한 검증 가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과학의 진술들과 구별되며, 이러한 점에서 형이상학의 진술들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경험과학의 다른 분야와 구별짓는 구획의 문제는 경험과학 자체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반면에, 귀납주의 자체가 그 가능성을 붕괴시킨다. 모든 과학적 지식이 근본적으로 경험에 근거해 얻어져야하고, 일반진술형의 자연법칙이 궁극적으로 직접적인 관측사실을 표현하는 단순진술들에 의해 참으로 검증되어야하는 것이라면, 참다운 자연법칙의 발견이란 포기되어야한다는 흄(Hume)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제 아무리 많은 자연의 사실을 채집한다고 해도, 이로부터 일반화된 보편법칙이 참이라는 보증수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귀납에 의해 일반화된 보편진술에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사실의 발견은 언제나 우리 경험 앞에 열려있다. 불과 50년 전의 한국인 모두는 아마 모든 새는 외형적으로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호주에 서식하는 키위가 발견된 이후 그렇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귀납에 의한 어떠한 가설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말 참이라는 점은 귀납원리에 의해 결코 확보될 수 없다.


흄의 딜레마를 피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 칸트는 이미 특정 보편진술의 정당성을 선험적(a priori)인 것으로 규정함에 의해 흄의 딜레마를 피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경험 이전의 혹은 선험적인 어떤 능력에 의해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붕괴시킨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실례로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칸트의 강한 믿음을 보라. 이 세계의 기하학적 구조가 유클리드 적이라는 신념이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대게 믿어왔지만, 그 믿음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철저히 부서지게되었다.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한스 라이엔바흐(H. Reichenbah)는 귀납원리를 확률개념과 연관시킴에 의해 흄의 딜레마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관측 데이터에 의거해 귀납적으로 얻어지는 보편진술은 절대 참이 필요가 없고 믿을만한 정도를 가지면 되고, 그러한 정도는 확률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식으로 확률을 도입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절대 참이라는 개념을 개연성에 근거한 확률의 개념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개개의 관측 사실에 근거한 단순진술로부터 보편진술을 얻는 귀납과정 자체를 검사할 상호주관적인 테스트 기준이 모호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라이엔바흐의 관점은 막말로 귀납에 의해 얻어지는 보편가설의 형태를 "모든 무엇은 이러이러하다"에서 "모든 무엇은 이러이러할 가능성이 크다"로 바꾼 것밖에 없다.


허위화(falsification)의 방법론


귀납주의의 근본적인 오류는 이론에 무관한 관측사실을 가정하고, 그러한 사실 자체가 검증의 기준이 된다고 믿은 데 있다. 귀납주의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의 원인이 되는 그러한 가정과 믿음으로부터 탈출해야만 한다. 경험과학 자체를 관측이 아니라 문제풀기 게임의 관점으로 접근해야한다. 자연법칙이란 마치 게임의 규칙 같은 것으로서 게임이 성립하기 위한 규범으로 취급되어야하지, 결코 관측에 의한 귀납의 결과로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물론 축구경기의 규칙과 달리, 경험과학의 법칙은 항상 깨질 수 있는 가설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귀납주의의 대안으로 다음과 같은 허위화의 방법론을 제안한다:


(F1) 진술들의 체계로서 이론의 논리적 구조는 순수한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 연역적(deductive)인 것이어야 한다. 모든 동물은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동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연역추론에 관측의 문제가 개입할 자리란 없다. 잠정적(tentative)인 가설들로부터 연역적으로 많은 결론들이 추론되므로, 우선 하나의 이론이 경험과학으로 취급될 조건은 무모순성(consistency)이다. 다시 말해 모순을 함축하는 결론은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F2) 그렇게 구성된 이론 속에서 경험적 요소와 논리적 요소를 명백히 구분하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이론의 경험적 요소가 걸러질 수 있고, 그 요소는 상호주관적인 테스트의 경험적 대상이 된다. 여기서 경험적 요소를 갖는 진술이란 동어반복과 같은 논리학의 진술이 아니라 실제 세상에 대한 어떤 내용을 직접 표현할 수 있거나 혹은 그러한 표현을 함축하는 진술을 도출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경험적 내용을 직접 갖거나 혹은 그러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갖는 진술들이 귀납원리에 의해 얻어진다는 믿음은 하나의 독단이다. 어떤 진술이 경험에 근거한다고 해서, 초기 비트겐쉬타인(L. Wittgenstein)이 주장한 것처럼 그 진술이 단순히 어떤 관측사실의 모방 혹은 그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개념이 지각경험에 투사되어 경험적 진술이 얻어지는 것이지, 결코 그러한 경험에 의해 사실들의 복제물로서 그러한 진술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경험과학이란 이론을 경험에 투사하는 것이다. 반면에 귀납주의자들에 의하면, 경험과학이란 어떠한 개념의 사전 개입도 허락되지 않은 관찰로부터 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관점이다.

(F3) 상호주관적으로 테스트 가능한 이론이란 근본적으로 허위화 가능해야한다. 가설로부터 연역된 결론들에 반하는 사례가 발견될 경우 관계된 이론 전체가 사장되고, 새로운 이론에 의해 대체되게된다.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것보다 더 많은 예측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훨씬 풍부한 경험적 내용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허위화란 이론 전체와 관련된다. 귀납원리에 의해 얻어진 어떤 보편진술의 경우, 하나의 변칙사례란 고작 그 보편진술을 거짓으로 만드는데 이용될 뿐이지 관련된 전체 이론을 위협할 순 없다. 다음 장에서 보게되겠지만, 자연법칙을 이루는 가설로서 보편진술은 결코 귀납원리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F4) 한 이론이 상호주관적인 테스트의 대상이 될 또 다른 필요조건은 신빙성(corroboration)의 조건이다. 한 이론으로부터 도출된 결론들을 경험적으로 적용함에 의해 그 이론은 경험적 테스트를 받게된다. 그러한 결론들이 참으로 판명될 때 그 이론은 받아들일 만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의 조건을 충족한다. 그러한 결론들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 그 이론은 논리적으로 허위화된다. 그 이론은 불완전 혹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고, 새로운 이론으로의 전환작업이 이루어진다. 신빙성의 조건을 충족하는 새로운 이론이 나올 때까지만 그 이론은 유용한 것으로 사용된다. 어떤 이론이 신빙성의 조건을 만족한다고 해서, 그 이론이 절대적으로 참이라는 의미에서 검증된 것은 아니다. 이론의 모든 가설은 궁극적으로 허위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정적이다.


F1과 F2는 진술들의 체계로서 경험과학의 이론이 가져야하는 구조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한 구조는 결코 귀납적인 것이 아니라 연역적인 것이어야 한다. F2와 F3는 어떤 조건 하에 한 이론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F2와 F3는 사실 경험 속에서 상호주관적인 테스트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단지 경험과학에 속하는 이론만이 그러한 상호주관적인 테스트를 받을 수 잇다는 점에서, F2와 F3는 또한 구획문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위 허위화 방법론에서 귀납의 원리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귀납주의자는 이론에 무관한 관측사실에 대한 망상을 갖고있다. 그러한 망상을 경험과학에서 배제시킬 때 우리는 관측에 의거해 절대 진리인 고정불변의 이론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또한 버려야한다. 한 이론이 신빙성 조건을 만족함에 의해 받아들일만한 것이라고 해서, 그 것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완벽한 이론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론은 경험에 의해 객관적으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포착하는 도구로 보아야한다. 경험 자체에 근거해 완벽한 객관적인 지식은 얻어질 수 없는 한에서, 진리란 목표일뿐이다. 진리란 결코 단 한번 주머니 속에서 꺼낼 수 있는 동전과 같은 것이 아니다.
by 취어생 | 2005/10/21 11:55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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