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2일
좌파 과학자 버날1. 방황에서 결단으로
원문: 좌파 과학자 버날1. 방황에서 결단으로 by 착한왕
과학과 사람, 이 주제만큼 데스몬드 버날(J.D. Bernal, 1901-71)을 평생 매료시킨 것은 없다. 그를 좌파과학의 대부로 묘사할 때 그 묘사는 단지 정치적 이념의 관점에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러한 정치적 이념의 관점에서만 버날의 과학과 삶이 평가된다면, 버날은 어느 정도까지 좌파였는지 혹은 그의 정치 사회적 활동은 정말 좌파 이념에 충실했는지 등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사회의 유기체 속에 기능했던 개인의 진정한 평가를 가로막을 것이다. 진정한 평가라는 것은 물론 모호하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은 결코 단절된 개개의 사건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전체 삶과 맞물려 개인이 평가되어야 하고, 또 이러한 평가는 사회라는 유기체와 단절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황에서 결단으로

버날이 맑스주의(Marxism)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켐브리지 대학 엠마뉴엘 칼리지(Emmanuel College) 시절 그의 왕성한 토론 모임의 활동에서 기인한다. 엠마뉴엘 칼리지 시절 전까지 버날의 정치적 신념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였다. 영국 잉글랜드에 대한 그의 반감에 대한 분석은 그의 정치적 개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버날의 가계는 원래는 스페인 유태인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암스테르담과 런던을 거쳐 아일랜드 리메릭(Limerick)에 정착했고 12명의 자매를 낳았다.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 사뮤엘, 애칭으로 샘이 데스몬드 버날의 아버지가 된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샘은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양 농장에서 일했고, 아버지가 죽자 돌아와 작은 농장을 경영했다. 35세의 샘은 여행광인 여동생과 함께 파리를 둘러보는 동안 21세의 베씨(Elizabeth Bessie Miller)를 만난다.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베씨는 고전에서 현대 문학에 이르기까지 관심사가 넓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샘과 베씨의 관계는 급진적으로 발달했고, 교재 1달만에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초기가 순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샘의 거점인 부룩웨잇슨은 베씨와 어울리기 힘든 시골 동네였다. 또 하나의 문제는 샘이 아일랜드의 구교 전통에 충실했다면, 베씨는 개신교를 믿었다. 그러나 둘은 미국, 유럽 대륙 그리고 아일랜드 사이를 왕래하면서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갔다. 베씨 덕에 버날은 자연스레 여러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베씨가 도시의 발랄한 문화생활을 즐기는 여성이라면, 아버지 샘은 농장주였다. 그들의 종교와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차이 그리고 아일랜드, 잉글랜드 및 프랑스를 오가며 교육을 받은 버날은 어린 시절 어떤 세계관을 갖게 되었을까?

버날은 어려서 일찍부터 문화의 다양성을 경험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의 종교적 갈등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와 달리 아일랜드의 고향으로 돌아오면, 동네의 큰 4개의 건물만 보인다고 버날은 회고한다. 커다란 법원, 감옥, 군대 및 경찰 시설이었다. 이 4개의 건물들은 어린 버날에게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압박과 권력으로 비춰졌다. 그는 아일랜드의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전적으로 잉글랜드의 정치적 모략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아일랜드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집에서 겪는 종교적 문제, 곧 아버지의 구교와 어머니의 신교 사이의 갈등도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버날이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주원인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의 원인은 폭발물 제조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잉글랜드를 제거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하지만, 그 계획은 계란에 바위치기처럼 느껴졌다. 버날은 고의로 잉글랜드 군사학교에 들어가 전략과 무기 제조법을 배워 나중에 잉글랜드의 제거에 이용할 꿈도 꾸곤 했다. 이러한 버날의 심리는 억압에 대한 반발심을 강화시키는 데 작동했다. 성장할수록 그는 일체의 군중 모임에 동화하기 어렵게 되었다. 버날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선진 문명의 과학기술과 지식을 일제를 통해 섭렵하면서도 일제의 억압에 찬동할 수 없었던 민감한 학생이 가진 그러한 것에 비유될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의 관계는 일제 강점기의 일본과 조선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가 겪은 미국과 유럽 대륙의 당양한 경험은 브릿지 게임과 농장일로 바뿐 아일랜드의 시골 생활과 쉽게 동화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러한 갈등 심리의 화살이 잉글랜드라는 적을 겨누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캠브리지 엠마뉴엘 칼리지에 진학하면서 버날의 삶의 양식은 변화한다.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그의 종교적 신념의 약화다. 둘째는 맑스주의의 간접적 체험이다. 당시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보급에 분주했던 에딩턴 및 철학자 러셀 등이 참석하는 여러 토론 모임에서 종교적 신앙에 호소한 논증과 과학적 논증의 구분이 버날의 의식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토론 그룹도 무차별한 종교적 교리 및 신앙에 대한 호소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이 점은 서양의 신학에서도 무시되지 않은 전통이다. 세속적 신앙에 물 들은 고향의 분위기에 익숙한 버날에게는 대학의 토론 모임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버날의 신의 대한 애착은 약해졌고, 버날은 급기야 예수와 교회와도 선을 긋게 된다. 이것이 세속적 의미의 단순한 종교적 개종은 아니다. 어떤 신선한 충격으로 급작스럽게 개종을 한 사람에게 과거 자신이 믿었던 종교는 오히려 깨부수어야 할 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사람에게 자기합리화에 의한 모종의 위안감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삶의 전략을 반영한다.

버날은 일찌감치 과학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구교와 신교가 마찰하는 성장 과정에서 그는 과학의 경험적 세계와 상징적인 종교의 세계를 화해하는 법을 터득했다. 버날의 종교와의 결별은 결코 종교적인 것에 대한 과학적인 것의 우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는 화려한 파리와 시골의 삶을 오가면서 세상사의 다양성을 일찍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버날은 정치와 교육에 개입하는 세력화된 교회의 입장은 용인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과학을 과학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기능하는 다른 분야와의 관계 속에 파악하는 버날의 태도가 반영되고 있다.

버날이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소련의 공산혁명에서 기인한다. 당시 공산혁명이라는 인간들의 실험은 대학의 큰 관심거리였다. 버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맑스에 대한 버날의 관심은 친구인 헨리 딕킨슨(H. Dickinson)과의 밤샘 토론에서 증폭한다. 때는 소련의 공산혁명 2주년을 기리는 1919년 11월 7일이었다. 버날의 회고를 들어보자.

“이 사회주의(맑스주의)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왜 아무도 나에게 이전에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던 딕은 몇 시간 동안 나에게 명쾌히 설명해주었다.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인 맑스주의의 이론이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했고, 도전적이며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나의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던가. 나의 군사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반응이었던가. 소련 민중에게 모든 힘을! 내가 증오한 모든 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자신들이었다. ‘잉글랜드의 공립 학생류의 신사’(the English public schoolboy gentleman)들의 교만함을 깨부수자. 과학적 세계 국가가 탄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명백히 아무 데도 없었다. 사람은 그를 요구하는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새로운 물결에 기여한다. 나는 공허한 내 인생 전체를 보았다. 나의 우주는 여러 조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버날의 회고에서 아직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감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적대감이 단지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변형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은 다른 땅의 우리에게 별 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다. 버날이 속한 곳의 개인적 경험 자체가 그에 대한 평가의 척도라면, 우리는 여기 이 순간에서 개인의 심리적 분석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좌파든 우파든 어느 쪽을 옹호하기 위해 버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다. 버날이라는 과학자의 인생경력은 그곳에서는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무턱대고 과학이 경제논리와 결합한 우리에게는 되씹어볼 가치가 있다.

버날의 회고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초기 ‘과학적 세계 국가’의 이상이다. 첫째, 그러한 국가 건설이 버날이 거부하지 않는 세계의 다양성과 양립 가능한가? 둘째, 모든 좌파 과학자들이 과학적 세계 국가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둘러싼 이들 사이의 갈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역사적인 맥락인가 아니면 다층적으로 해석 가능한 맑스주의의 양면성인가? 버날이 의도한 과학적 세계 국가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버날 개인뿐만 아니라 좌파 과학의 역사적 평가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 질문들은 뒤로 미루자. 여기에서는 과학과 사람들이라는 주제에 버날이 인생을 걸게 되기까지 방황에서 결단의 과정이다.

버날의 관심은 과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과 정치의 관계로 이동했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또 한 가지는 섹스다. 나처럼 나이가 먹을 대로 먹은 수컷이든 젊은 수컷이든, 섹스는 빼먹을 수 없는 주제다. 암컷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섹스의 관심을 실전으로 옮기면서 만족해하는 실천형의 부류가 있다면, 멀리서 관망하는 이론형의 부류도 있다. 또 실전 속에서 이론을 추구하는 부류도 있다. 버날은 이 부류에 속한다. 그의 섹스에 대한 관심은 그를 프로이트에 심취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프로이드 토론 모임의 핵심 회원이 되었고 이 모임 활동을 통해 아일린(Eileen Sprague)을 만난다.

지금의 우리 대학의 풍토는 토론 모임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졌다. 기껏해야 전공에 목매인 대학원생들의 모임을 제외한다면, 학부 학생들 사이에 문화와 함께하는 다양한 토론 모임은 사라진지 오래다. 토론 모임에서 자연스러운 ‘짝짓기 문화’(mating culture)도 고갈된 상태다. 현재 이 땅에는 다양한 학풍이 정상적으로 건설될 기반이 대학에는 없다. 대학은 쓰레기장이다. 학생들 잘못은 아니다. 교수 중에 얼마만큼이 권위를 벗어 제치고 각종 학생 토론 모임에 무상으로 참석해주는가? 그 소박하고 나설 줄 모르는 내성적인 디랙(P. Dirac)이 지금 이 나라의 민족주주의의 환상과 결합한 노벨상을 타게 된 기반은 토론 모임에 근거한다. 토론 모임에는 위아래가 없어야 한다. 그 모임은 하나의 자체적인 작은 사회가 되어야 하며 역사적으로 자체적인 전통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디랙, 버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토론 모임이 얼마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역사 속에서 증명된다.

아일린은 당시 캠브리지 대학의 비서였다. 버날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버날은 그녀와 결혼했다. 버날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일린은 그런 그를 위해 논문을 타이핑해줬고, 그의 논문은 X선 크리스탈로그래피(Crystallography)의 창시자인 노벨상 수상자 브래그(W. Bragg) 경에게 보내진다. 브래그 경은 버날이 왕립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제 버날에게 결단은 끝났다. 과학자 이전에 이 세상 속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방황의 시기를 끝내고 결단을 실행할 시기가 온 것이다. ‘사람의 세상 속에 과학을 실현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고 시도함으로써 실험적으로 좋은 삶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아주 소수만 그렇다. 대부분은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전형화되고, 그들 중 나머지는 해놓은 것을 모방한다. 단지 지극히 일부만 이곳, 저곳에서 일탈한다. 그들은 괴짜들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나 자신 또한 그들 중 한명으로 손꼽히게 되리라.”
See also 위 아래 없는 자유로운 토론문화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에서 과학도로 살아감은
by 취어생 | 2005/10/22 05:40 | 트랙백(1) | 덧글(1)
Tracked from 생명에 취한 사람 at 2005/10/31 15:43

제목 : 좌파과학자 버날2: 좌파, 민족주의, 신념
원문: 좌파과학자 버날2: 좌파, 민족주의, 신념 by 착한왕 좌파, 민족주의 그리고 신념 버날이 생각하는 과학적 세계국가의......more

Commented by 카이첼 at 2005/10/26 17:10
좋은 글입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 -순수하고 순진한 천재, 다시 말해 일상에 무지한 천재-라는 것이 먼슬리 리뷰의 창간 기념에 아인슈타인이 쓴 글에 대해 미 정부가 이 천재를 대중이 과학이라는 틀을 통해서만 바라보도록 유도한 이미지 공작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이러한 논의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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