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 과학과 철학
2005/11/04   진화의 의미: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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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04일
진화의 의미: 서문
The Meaning of Evolution : The Morphological Construction and Ideological Reconstruction of Darwin's Theory (Science and Its Conceptual Foundations series)

번역: 김우재

이 책은 진화생물학에서 주요용어로 사용되어 온 '진화'라는 용어의 역사를 다룬 에세이로 시작한다. 이미 많은 과학사가들이 진화의 의미를 두가지의 구별되며 겹치지 않는 의미로 정립시켜놓았기 때문에 나의 작업은 피상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17세기에 '진화'라는 말의 의미는 '전성설'-배아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이미 어른형태의 미니어쳐가 형성되어 있으며 잉태기간동안 이 미니어쳐가 펼쳐지거나 '진화'한다는 의미의 이론-의 이론을 언급하는 데 사용되어졌다. 1850년대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유행되기 시작한 두번째 의미의 '진화'는 변형에 의한 후손으로서의 종개념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두가지 용법의 '진화'를 완전히 구분되는 '개가 짖는(bark of the dog)'것과 '나무의 껍질(bark of the tree)'처럼 이해해왔다. 그들은 이 둘을 혼동해서 사용하게 되면 나무가 당신을 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연구를 통해 나는 '나무'에 대해 좀더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 두가지 용어가 역사적으로 '진화'과정 그 자체와 별반 다르지 않게 합성되었다고 믿는다. 더 오래된 발생학적인 아이디어가 두세기를 거치면서 변형되었고 결국 우리에게 친숙한 종의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 과거를 담고 있게 되었다.

이러한 두가지 다른 의미의 '진화'사이의 역사적 잃어버린 고리는 에른스트 핵켈의 이론이다. 헥켈의 이론은 일반적인 히스토리오그라피에 따르면 19세기의 말엽에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극단적인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좋은 다윈주의자들에 의해서는 끔직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핵켈은 그의 진화이론을 일종의 생물유전학적인 법칙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배아는 한종이 진화하면서 겪은 발전과정의 형태학적 단계를 그대로 밟아간다. 즉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Ontogeny recapitualted phylogeny). 정립된 정통설은 핵켈의 계통반복설은 카인처럼(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이념에 휩싸인 과학이며 근대 신다윈주의의 합법성과는 차별된다고 이야기한다.

분명히 역사적으로 핵켈의 이론을 폄하시킨 어떤 정통적 입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핵켈의 책을 연구하면서 나는 그 책에 담긴 낭만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일식 다윈주의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이론이 단순한 사기꾼의 그것이 아니라 다윈의 적통들과 강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영국의 천재적인 후손들 또한 계통반복설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의심된다. 이제 다윈의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돌아가보면, 나는 다윈의 이론이, 그 개념과 성숙과정에서 모두, 이미 존재하던 그 원칙의 리듬에 박동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처음 절반은 진화의 원래 의미가 어떻게 변형되어갔는지를 추적한다. 이는 계통반복의 원칙으로부터 종의 후손이라는 개념으로의 변화과정을 의미한다. 나는 '진화'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면서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실제로 사용된 그 단어의 용법을 사용했으며, 이는 역사적 재구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다윈이 단순히 계통반복설의 옹호자로서가 아니라, 그 원칙 자체가 그의 개념의 내적특성이며, 발생학적 진화와 종의 진화가 같은 과정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이론에 대한 이해 없이는 다윈의 이론이 가지는 가치자체가 받아들여질 수 없었음을 말할 것이다. 두가지 진화과정 모두가 동일한 패턴의 배열에 따라 점진적인 형태상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제 나에게는 다윈이 발생학적 진화 모델에 의존했음이 확실해 보이며, 그가 계통반복설을 사용했음이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왜 그토록 많은 역사가들이 격렬하게 그 반대의 경우만을 이야기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나는 그 해답이 이념의 어두운 샛길에 놓여 있다고 믿으며, 책의 결론부에서 이 믿기 어려운 과정에 대한 나의 낙담스러운 감정을 표현해 볼 것이다.

이후 감사의 인사는 생략
by 취어생 | 2005/11/04 10:55 | 과학과 철학 | 트랙백(1)
2005년 10월 28일
이마니시 긴지와 기무라: 일본의 과학과 서구의 과학
원문: 이마니시 긴지와 기무라: 일본의 과학과 서구의 과학 by 김우재

기무라와 함께 현대진화론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한명의 일본 학자를 꼽으라면 그는 바로 이마니시 긴지(Imanishi Kinji, 일본명 今西 錦司 금서금사, 이후 긴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02년에 태어나 1992년에 죽었다. 기무라가 1924년에 태어나 1994년에 죽었으니 그보다 20년 앞선 대선배인 셈이다.

그를 딱히 한 분야의 학자로 잘라말하기는 어렵다. 분명 그는 곤충학으로 학문을 시작했지만 훗날 일본 영장류학의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인류학, 생태학, 철학 또한 전문 등반가로서도 전문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그는 매우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19세기 과학의 중흥기의 유럽 귀족가문의 조건을 타고난 인물이다.

히말라야에도 오른적이 있는(골턴도 대단한 여행가였으며 여행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골턴의 저술 중 절반 이상이 여행에 관한 것이다) 긴지의 관심사를 등산 이외의 것으로 좁혀 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환경 속에서 살아 가는 종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서식역 분할(habitat segregation)개념이 등장한다. 크로포트킨이나 당시 일본 철학의 한 계보였던 기타로 니시다(Kitaro Nishida)의 공개념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긴지는 생명을 전체로서 보기 원했고, 환원주의를 싫어했다.

그는 그의 연구 대부분을 교토 중심부를 흐르는 가모가와 강변에서 수행했고 이곳에 서식하는 날도래 유충을 연구했다. 그의 '서식역 분할' 개념은 바로 이 수생생물을 연구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서식역분할'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어느 한 지역에 다양한 생물의 종류가 있어서, 각 종은 하나의 종사회를 형성하면서, 사회적으로는 각 종이 단위가 되어 다른 것들과는 교섭없이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있어서는 말하자면 경제적인 결부가 맺어져 있다. 그것에 의해 어느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생물은 상호간에 얽혀 있으면서도 각각의 사회를 성립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종의 사회가 어느 지역에 중합되어서, 나아가서 그 종들은 경제적인 결부를 통하여 하나의 세트로서의 구조를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한 생물의 종사회의 중합을 전체사회라고 부른다. 그 전체사회라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종사회라는 것은 전체사회에 대한 부분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요약될 수 있다.

1) 종에 속하는 개체들은 동일한 생활유형에 따라 살아가기 위하여 상호간의 동종인식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종의 법칙을 협력적으로 따른다.
2) 따라서 그들은 종-사회(species=society, SS, 일본어로는 Shu(Species)+Shakai(Society)를 이룬다. 이를 이마니시는 종사회(specia)라고 부른다.
3) 모든 종사회는 조화롭게 전체 생물권을 형성한다.
4) 새로운 종의 집단은 종사회로서의 단일성을 유지하려는 과정과 이 집단이 전체 생물권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진화한다.
5) 종분화는 종사회를 분할하거나 나누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즉, 서식역 분할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연관되어 있는 종들-아종-이나 종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종들은 서로 다른 생활습관과 서식역을 선택함으로서 같은 지역에서 고립되지 않더라도 종분화가 가능하며 서로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분할이 가능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이마니시의 답변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작의 부재가 이마니시를 둘러싸고 1985년부터 네이쳐지에서 펼쳐진 많은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사실 이에 대해 그는 한마디를 남겼다.

"변할 때가 되면 변한다."

그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하고 만것은 아닌데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개체와 종 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 전체사회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생각을 펼쳐 본다면, 전체사회의 입장이 변하면, 그와 함께 전체사회에 대한 부분사회로서의 종사회가 어떤 새로운 환경에 떨어뜨려져서 살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오고, 그러면 이 종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개체도 그 경우에는 개개의 개체의 입장에서 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처음에 말했던 대로, 개체간에 갑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의 밑에서는 그 개체의 각각이 똑같게 반응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역시 종이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에는 개체도 변한다. 그 개체의 변화라는 것도 다윈이 생각했던 것처럼 개개의 개체의 'random'한 변화가 아니고, 한 종 속의 개체라는 것은 어느 개체도 전부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현재의 진화론적 정설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발언을 당시 긴지는 매우 용감무쌍하게 제시했다. 굳이 들자면 현재 진화론의 정설은 선택의 단위에 있어서-다층 선택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유전자와 개체를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는 정향적인 진화설과 비슷한 발언을 하는데, 진화에서의 돌연변이의 발생이 환경과 일종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다윈에 의하면 환경과는 관계 없는 우연한 변이들이 생기고 자연선택에 의해 이들이 선택되지만, 이마니시에 의하면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하나의 종사회의 내부에서 동시에 다발적으로 정향적인 돌연변이가 나타남으로써 이것이 축적되어 신종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진화의 역사에서 특정한 시기가 되면 동시다발적인 돌연변이가 발생하며, 이러한 돌연변이는 방향성을 가지고 매우 단시간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돌연변이에 의해 종의 분화가 가능해진다. 현재 우리가 이러한 급작스런 변화를 볼 수 없는 이유는 그에 따르면 현재가 진화의 '정체기'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진화의 속도와 관련해서 굴드와 점진주의자들의 대립을 떠올리게 하는데, 속도와 관련하는 한 이마니시의 설명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돌연변이의 방향성은 현재로서는 직접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요약하자면 긴지에게 돌연변이란 환경의 변화때문에 종의 필요에 의해 발생하는 사태다. 종에서의 개체들이란 거대한 환경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비슷하므로 똑같다고 볼 수 있고, 결국 개체들의 집합인 종은 함께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을 인정하지 않는 긴지도 서식역 분할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서식역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을 가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긴지에게 종내에서의 경쟁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더 나아가 그는 130만종이 넘는 엄청난 생물종의 다양성에 주목한다. 이처럼 광대한 다양성과 자신의 '서식역 분할'을 결합시킬 때 그에게 나타나는 사상은 생태계가 경쟁의 장이 아니라 평화공존의 상태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세포내 공생을 밝히면서 이를 근거로 자연계를 평화와 공생의 장으로 몰고 간 미국의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gulis)를 떠올리게 한다. 마굴리스의 마이크로코스모스의 저술이 1986년이었으니 여기서 긴지는 서구 학자들보다 또한번 앞서갔다.

그가 발견한 '서식역 분할'이라는 현상은 자연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현재 이마니시가 비판받는 부분은 이러한 서식역 분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 현상을 해석한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홀스태드에 의해 1985년 네이쳐지에서 최초로 거명된 이래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다. 그에 대한 논쟁사는 매우 유명하므로 첨부하는 이성규의 논문이나 이마니시 진화론에 대한 간략한 소개 해놓은 예전 김우재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후 일본에서 지속된 이마니시의 진화론에 대한 영향과 논쟁에 관해서는 첨부하는 논문 <The Recent Controversy in Japan on Evolutionary Studies in Reference to Explosive Speciation of the Cichlids in Lake Victoria:Focused on Species=Societal Theory of Evolution>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그가 개체와 종과 전체사회를 논하는 것이 일본의 특징적인 문화인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일본 문화와 생물학적 전통과 관련해서 많은 글들이 특히 서구학자들에 의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동양의 자연과의 조화라는 철학과, 전일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며 마치 서구에는 그런 것이 없는듯 말하고, 이로서 동양과 서양을 완전히 갈라놓으려 하는 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마니시를 다윈이나 스펜서와 비교하며 그가 동양의 유기체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멍청한 짓거리다. 유기체적 사고를 하는 이가 자연의 무작위성보다는 정향진화를 주장하고, 스펜서와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또한 그의 사고가 동양을 대표한다면 동양의 유기체적 사고란 개체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의미하는 것인가? 동양의 전일론과 서구의 환원주의, 동양의 전체주의와 서양의 개인주의라는 낡은 잣대로 과학을 난도질하는 것은 역사를 세밀하게 보지 않은 자들의 무지일 뿐이다.

과학이 분명 역사의존성과 문화의존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에는 측정량과의 연결성과 재생가능성이라는 제한이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기무라와 긴지라는 두 인물 모두가 다윈의 진화론에 반하는 이론을 만들었다는 시각으로 일본문화와 과학을 접근하려는 이들도 반드시 기억해두기를 바란다. 과학을 외재주의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과학을 진정으로 해친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두번째 주제는 그의 평생을 두고 지속되는데 바로 영장류의 행동에 관한 연구였다. 진화론에 관한 연구에서 그는 많은 논쟁이 되었고 또한 최근에 그의 이론들이 문제가 있음이 그의 후배들에 의해서도 분명해지고 있지만, 영장류 연구에서 그의 연구업적은 독보적이며 현재 세계의 영장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영장류 연구 결과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에 비유될만한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마를 씻어 먹는 원숭이가 바로 그와 동료들의 작품이다. 그가 세운 일본 교토(京都)대학 영장류연구소는 현재 세계적 권위를 자랑한다. 이마니시 긴지 이래 이타니 준이치로(伊谷純一郞), 가와이 마사오(河合雅雄), 마쓰자와 데쓰로(松澤哲郞) 등의 학자들이 학맥을 이으며 세계 영장류학을 선도해 오고 있다. 그들은 고구마를 씻어 먹는 원숭이의 행동습관을 발견함으로써 동물사회의 문화 전파와 계승을 입증했고, 동물사회의 구성원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장기간 관찰하는 방법론을 정착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원숭이들의 친족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64년 해밀턴이 친족선택 이론을 발표하기 전에 연구에 착수했다.

영장류 연구에서 가장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국내에도 방한한 바 있는 구달 여사일 것이다. 구달은 루이스 리키(Louis Leaky)의 제자로 리키는 3명의 유명한 여제자를 두었다. 1957년 가장 먼저 비서의 신분으로 참여한 제인 구달(Jane Goodal)이 침팬치와 인연을 맺었고, 1966년 다이안 포시(Dian Fossey)가 리키 박사의 제의로 고릴라 연구에 참여했으며, 1968년 비루테 골디카스(Birute Galdikas)가 오랑우탄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게 된다. 이 세사람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국내에도 알려져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리키가 영장류 연구가 인류의 조상과 인간의 진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줄 것임을 알고 제자들과 연구에 착수하기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긴지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연구에 착수했고 독자적인 관찰기법까지 확보해 놓았다. 그러나 리키와 긴지를 비교하기전에 레이 카펜터(Ray Carpenter)라는 미국의 영장류 연구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생리학자로 출발해 결국 영장류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의 주관심사는 영장류의 사회적 관계와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100여마리의 원숭이를 일일이 이름붙이고 세대에 걸쳐 이들을 관찰한 일본 연구가들처럼 할 수는 없었고, 결국 긴지를 찾아가 많은 것을 함께 연구하게 된다. 또 카펜터는 뒤에 일본 영장류 연구의 지원자로 남게 된다.

이마니시와 그의 팀이 1958년 이러한 연구결과를 들고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반응은 매우 차가운 것이었다. 그들은 연구대상을 인간처럼 대하는 그들의 방법을 비웃었고(이 점은 구달에 대한 학자들의 최초반응과 유사하다) 그 많은 원숭이들을 인간의 능력으로 구별할 수 있느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뒤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이론이 아무리 독창적이더라도 서구에 흡수되기는 힘들었고 언어장벽이 또 한번 그를 가로막았다. 과학의 영역에도 영어의 독재는 분명히 존재한다.


드발은 최근 그의 리뷰에서 이러한 이마니시의 연구에 일본의 철학과 문화가 깊이 배여 있으며, 일본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지만, 정확한 분석없이 그러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잘은 모르지만 드발이 서구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면서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거의 동시대를 살면서 진화와 관련해 어쨌든 세계적 논쟁을 벌인 두명의 거대한 학자가 탄생했다. 한명은 긴지고, 또 한명은 기무라다. 긴지가 전통적인 박물학과 동물행동학의 위치에서 진화론에 접근했다면, 기무라는 집단유전학의 수리적 기법으로 진화론에 접근했다. 진화론에 접근하는 학자들의 유형은 다양하다. 이 점이 바로 진화론이라는 학문이 여러 학문간의 융합의 흔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긴지와 기무라를 다루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들이 접근한 분야가 일본에 존재했다는 그 사실이고, 나아가 이 분야들이 존재했으며 성장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의 성장과 발전, 새로운 이론의 탄생과 과학자의 등장에 있어서 동양적 세계관과 서양적 세계관이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낡은 이분법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의 과학자가 등장하는 데 있어 요구되는 시스템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이점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왜 일본은 가능했으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는, 이러한 과학자의 등장이 요원한가 하는 것이다. 일본은 서구 과학의 전통에 우리보다 먼저 접할 수 있었고, 그 길을 충실히 따랐으며 학제와 대학등에 있어 많은 부분이 과학의 발전에 분명 유리했다. 우리의 경우 식민지 시대와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가속화된 경제논리등만을 언급해도 충분하리라 보인다. 이러한 차이와 과학과의 관계를 누군가는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한국의 STS들과 과학사가들이 이러한 부분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올리는 파일들은 이마니시 자신이 직접 쓴 논문 두편과, 서식역 분할과 관련하여 이마니시 진화론에 대한 소개인 이성규의 논문, 그리고 최근 프란스 드 발이 쓴 이마니시의 영장류 연구에 관한 논문, 또한 위에서 언급된 일본에서의 이마니시진화론의 전개양상에 대한 논문등이다. 드 발의 논문과 관련하여 최근 드발의 <원숭이와 초밥요리사 : 동물행동학자가 다시 쓰는, 문화란 무엇인가?> 이 번역되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읽으시면 좋을 듯하다.

드 발의 글을 제외한다면 영어로 된 이마니시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일권에서 이마니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것 같은데 -Wuthenow, Asa-Bettina and Satoko Kurahara, (transl) 2002. Imanishi Kinji. Die Welt der Lebewesen. München: Iudicium Verlag GmbH.2> Wuthenow, Asa-Bettina and Satoko Kurahara, (transl) 2002. Imanishi Kinji. Die Welt der Lebewesen. München: Iudicium Verlag GmbH- 이유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이마니시 아카이브가 현재 건설 중이며 이 작업에는 알버타 대학의 인류학 교수 Pamela Asquith 가 힘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 의해 긴지의 책 <The World of Living Things>가 번역되었다.

by 취어생 | 2005/10/28 21:57 | 과학과 철학 | 트랙백(1) | 덧글(2)
2005년 10월 26일
한국의 유전학 전통
원문: 한국의 유전학 전통 by 김우재

기무라를 공부하면서 멘델에 대해 심층 분석을 시도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정말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된다. 결국 이러한 제문제들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시켜보려는 노력이 언젠가는 있게 될 것이다. 아래의 글

분자전쟁: 다윈에서 황교주까지

에서 나는 한국에 유전학적 전통이, 특히 집단유전학의 전통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말을 꺼냈다. 유전학과 생화학의 결합이 가능했던 전통에서 분자생물학이 탄생했다. 생화학은 화학의 전통과 양립할 수 있고 그 기반이 마련될 수 있지만, 유전학은 농업과 연관된 곳에서만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미셀 모랑쥬의 분석에서 프랑스는 유전학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채 분자생물학을 발전시킨 나라로 등장한다. 라마르크의 전통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생화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자유로왔던 프랑스는 독특한 분자생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벌어졌다면 그것이 프랑스와 비슷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 내게는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으나, 유전학의 전통이 강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유전학의 전통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농업과 깊이 연관되지 않았다. 한국 유전학회의 설립이후 대부분의 논문은 토마스 모건학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유전학회지 첫호의 논문들은 아래와 같다.

1. 초파리 두 동포종간의 (同胞種間) 잡종 생재력에 대한 온도의 영향에 관한 연구 이원호 , 박형식 ( Won Ho Lee , Hyung Shik Park )
2. Human Lymphocytes 에 있어서 염색체 이상의 좌위와 (座位)복제 pattern 김무연 ( My. A . Kim )
3. 초파리 자연집단의 염색체 다형현상백용균 ( Yong Kyun Paik )
4. Salmonella typhimurium 내의 plasmid pKM101 존재와 유전자 uvrB 결손이 화학물질의 돌연변이 유발성과 독성에 미치는 영향 변우현 , 이세영 ( Woo Hyeon Byeon , Se Yong Lee )
5. 하늘나리의 핵형과 (核型) 염색체의 분염상

이후 계속해서 등장하는 '초파리'라는 검색어는 다른 연구대상에 비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했던 학자들이 대거 국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기였고, 미국유학파가 대부분의 국내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시점을 고려해보건데 국내 유전학에서 모건학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모건은 어떤 인물인가. 모건은 초파리를 유전학의 실험동물로 정착시킨 인물이며 유전학으로 최초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멘델 이후 다루었던 피셔, 홀데인, 라이트와는 다르게 모건에게는 수학적 성향이 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초파리의 염색체 지도를 작성함으로서 노벨상을 받았고, 모건은 세포학과 유전학을 결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모건은 진화종합의 인물들 사이에서 거명되지 않는다. 국내의 유전학자들이 모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들이었고, 이들이 피셔, 라이트, 홀데인의 전통과는 단절되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수학적 성향이 강한 집단유전학의 전통이 거의 부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이 언젠가는 완성된 형태를 갖추겠지만, 현재 내게는 학부시절의 한 은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에 대한 회고가 내게 타이핑을 칠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그 분의 이름은 '최영'. 연세대학교의 유일한 유전학 교수이시다. 그는 유일하게 유전학이라는 이름으로 실험실을 갖추고 있으며 또 유일하게 유전학을 강의하는 교수다. 또한 제자가 없는 실험실에서 혼자 무엇을 하시는지 아무도 모르는 괴짜이기도 하다. 학부시절 우리에게는 그에 대한 기괴한 소문이 무성했다. 실험실에서 혼자 수학공식을 써두고 고민하는 괴짜 학자의 모습에서부터 싸이코의 모습까지..

그의 강의는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매우 차분하고 인상적이었다. 물론 십년동안 강의록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고, 수백개의 연습문제에서 골라내는 시험문제는 5문제중 2문제만 풀어도 A를 받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그의 강의는 까다로왔다. 그의 강의에서는 주로 멘델리안 유전학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인간질병을 다루었다. 집단유전학의 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진화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 분은 Wien 대학이라는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하셨다. 초파리의 Adh 유전자와 Nucleotide polymorphism이 주요 연구테마였다. 제자를 받지는 않으셨지만 한국 유전학회지에는 꽤 많은 논문을 게재하셨다. 그의 논문에는 수학공식이 등장하고 도브잔스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피셔나 라이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도브잔스키는 모건의 제자다. 그는 라이트가 내어 놓은 간단한 수학공식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피셔~라이트의 전통속에 서 있는 국내 유전학자를 알지 못한다. 국내의 유전학자들은 초파리와 관계된 이들이 아니면(대부분 유전자 하나를 다루는 차원이다), 식물유전학자들(이들도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다루기는 하지만 집단차원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 혹은 분자유전학자들(KO Mice등을 다루며 유전자를 없애거나 바꿔치는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이 전부다. 분명 우리의 생물학적 전통에는 피셔도, 홀데인도, 라이트도 없다.

만약 그 전통이 있었다면, 그래서 생물학이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면 현재 생물정보학이니, 시스템 생물학이니 하는 문제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충격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최영 교수를 생각하는 지금 왜 그분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깊게 밀려온다. 물론 그 분은 매우 엄하고 무섭고 대화자체를 거부하는 분이시기는 했다.
by 취어생 | 2005/10/26 15:49 | 과학과 철학 | 트랙백 | 덧글(2)
2005년 10월 24일
Sewall Wright 서얼 라이트: 진화종합의 변두리에서
2005년 10월 24일, 한 소박한 과학자 Sewall Wright를 떠올리며..
원문: Sewall Wright 서얼 라이트: 진화종합의 변두리에서 by 김우재



1930~40년대를 거치며 진화의 종합설(Modern Synthesis)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흔히 바이스만에 의해 체택된 신다윈주의(Neo-Darwinism)와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바이스만의 업적은 당시 유행을 이루고 있던 신라마르크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입지를 가진다면, 진화의 종합설은 다윈의 자연선택에 기반한 진화론을 집단유전학의 이론들과 한데 엮는 작업이 주요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물들의 위명을 접하게 된다.

멘델의 재발견과 베잇슨-바이오메트리션 논쟁등을 제외한다면, 진화의 종합설을 다룰 때 가장먼저 등장하는 삼총사는 수학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세 사람, RA Fisher(로날드 피셔), JBS Haldane(홀데인), 그리고 Sewall Wright(서얼 라이트)다. 이후 고생물학자 심슨(GG Simpson),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 도브잔스키(Dobzhansky), 줄리앙 헉슬리(Julian Huxley)등이 등장하나 이들에 관해서는 현재로서는 별다른 관심도 없고(지나치게 선동가적인 그들의 기질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현재 작업중이니 훗날 밝혀질 것이다) 별다르게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중 피셔가 아마도 가장 유명할 것이다. 통계이론의 발견자로서 유전학과 진화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피셔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피셔의 아카이브에 가보면 그의 논문집을 1. 통계학과 수학적 응용에 관한 것과 2. 유전학, 진화론 그리고 우생학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번째와 관련하여 피셔는 The Genetical Theory of Natural Selection (자연선택의 유전학적 이론, 1930)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Blending Theory(BT: 다윈을 비롯하여 멘델 이전에 유행하던 유전개념, 비탄성입자간의 섞임 현상)의 유전개념을 Particulate Inheritance(PI: 멘델의 재발견 이후 정착된 유전개념, 유전자를 탄성입자로 가정했기 때문에 각 대립인자는 섞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유전됨, 멘델의 독립유전법칙과 연결됨)의 입자유전개념과 대비하여 세대를 거치면서 변이가 감소하는 것을 설명해냈다. BT에서는 한세대가 지나면 변이는 1/2(1+r, r은 대립인자간의 연관도)만큼 줄어들게 됨으로 인해 그 손실분을 돌연변이가 메꾸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입자유전에서도 한세대당 1/4N(N은 각 세대의 교배하는 개체수)만큼 변이가 줄어들게 되지만, 피셔는 진화란 충분히 큰 집단에서 일어나므로 이러한 변이의 손실은 매우 느린과정이고 따라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내린다(후에 그의 1/4N은 실제로는 1/2N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 그는 진화에서 자연선택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나머지 진화의 원인들인 돌연변이, 무작위적 유전자 표리(random genetic drift), 이주(migration)등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홀데인은 The Causes of Evolution (진화의 원인들, 1932)이라는 책을 쓴 인물로 유리한 대립인자의 고정 가능성에 관한 이론, 성연관 유전(sex-linked)에 관한 이론등을 내놓았으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매우 설득력있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라이트는 Evolution in Mendelian populations (멘델집단에서의 진화, 1931)라는 책으로 등장하면서 유명해진다. 그는 집단유전학에 확산이론을 도입한 인물이다. 또한 진화에 있어 자연선택 이외에도 다른 원인들이 모두 관여한다는 점을 그의 Shifting-balance theory of evolution로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진화적 풍경(Evolutionary landscape)라는 색다른 방법으로 진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흔히 라이트는 무작위적 유전자 표리를 강조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또한 이 때문에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하지만 논문에서 그는 한 종의 형성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첫 단계는 유전자 표리가 강조되는 무작위적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 종은 더 높은 적응도를 가진 점으로 올라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쉽게 해주기 위해서 라이트는 많은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큰 집단을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에는 자연선택이 주로 관여하며 이 과정에서 적응도가 낮은 집단은 소멸한다.

라이트는 두가지 단계 중 어느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전자 표리가 진화의 raw-material을 제공해주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라이트는 진화를 유전자 표리라는 무작위적인 힘과 자연선택이라는 결정론적 힘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점은 그가 죽을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즉, 그의 논문의 논증구조는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1930년대 박물학자들 사이에서 낮은 수준의 차이는 비적응적이라는 견해가 등장했을 때, 라이트는 그의 논증구조의 첫단계를 강조하며 이들에게 동의했다. 하지만 곧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러한 낮은 수준의 차이들조차 적응적이라고 고백하자 라이트는 다시 논증의 두번째 단계를 인용하며 자연선택을 강조했다. 라이트의 논증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현장 박물학자로 훈련받은 적도 없었고, 전문적인 수학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수학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생리유전학을 공부했고 생리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농림부에 근무하게 되었고 거기서 육종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당시 진화종합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박물학자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생물학에서 이들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라이트는 이들의 견해가 바뀔때마다 전문가인 이들의 견해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자신의 논증을 적절히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화종합설이 (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견고해지면서 자연선택을 강조하는 적응주의자 진영의 의견이 당시의 생물학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라이트와 이상한 동거관계를 맺고 있던 도브잔스키(그는 알맞은 집단크기를 알아내기 위해 라이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라이트가 써준 가장 간단한 방정식도 이해하지 못했다)도 적응주의 진영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되고, 라이트마저 자연선택을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한다.


라이트가 자연선택 이외에 무작위적 유전자 표리를 주목한 것은 그의 육종가로서의 연구경험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제대로된 품종을 만들기 위해서 육종가들이 실제로 하는 역할에 주목했다. 육종가들은 귀가 긴 당나귀를 만들기 위해서 귀가 긴 당나귀끼리 교배하는 단순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귀가 긴 형질을 골라내면 다른 형질에도 영향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이들은 귀가 긴 형질을 골라내면서 여러 그룹의 계대를 만들고 이들간의 interbreeding으로 원하는 형질을 갖추었으면서도 다른 형질에 이상이 없는 계대를 골라낸다. 즉, 자연선택(육종가의 선택)으로 최종적인 종이 걸러내진다 하더라도 무작위적 유전자 표류(육종가 맘대로 되지 않는 형질의 변화와 복잡성)를 무시할 수는 없으며, 이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많은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집단(여러 계대를 만들고 이들간의 interbreeding을 하는 육종가들의 방식)에서의 진화였던 것이다. 라이트는 피셔가 상정한 매우 이상적인 집단(특별한 구조 없이 모든 개체가 랜덤하게 교배하는)에서 각각의 유전자가 가진 매우 작은 유리함이 개체로서 결국 선택된다는 관점에 맞서 라이트는 그의 육종가로서의 지식을 이용한 것이다. 하나의 순종계대를 얻는과정은 피셔가 상정한 것처럼은 되지 않으며 그것은 육종가들에게는 상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균형잡힌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항상 유전자표류와 엮이게 되고 유전자표류에 의한 효과에 서얼 라이트 효과(Sewall Wright Effect)라는 이름까지 명명되게 된다. 포드(EB Ford)오 피셔의 연합공격으로 지친 라이트에게는 마땅한 대비책은 없었다. 그는 때를 기다렸고, 죽기전 그에게 씌워진 불명예를 거의 모두 벗어버릴 수 있었다.

라이트와 피셔와의 논쟁은 두단계로 진행된다.

1. 피셔가 Theory of Dominance를 발표한 직후 American Naturalist지를 통해 라이트, 홀데인이 이를 반박한다. 라이트는 근친교배 혹은 근연교배(inbreeding)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부모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라이트의 Shift-Balancing Theory가 등장하고 그의 이론이 유전자표리와 엮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선택을 강조하던 피셔진영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포드가 라이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올리는 파일들은 서얼 라이트의 대작인 1931년작 Evolution in Mendelian populations와, 1932년 작 The roles of mutation, inbreeding, crossbreeding, and selection in evolution, 그리고 Statistical Theory of Evolution이다. 라이트가 구제되는 데에는 그 자신이 일흔이 넘어 집필한 책들도 큰 몫을 했지만, 진화학계에서 서서히 등장한 다층선택 이론등도 큰 몫을 했다. 게다가 윌리암 프로빈(William Provine)이라는 훌륭한 전기작가로서의 과학사가를 만난 덕에 라이트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다. 프로빈의 "Sewall Wright and Evolutionary Biology (Science and Its Conceptual Foundations series"에 대한 굴드의 리뷰논문도 함께 들어 있다.


진화종합의 변두리라는 말은 굴드에게 서얼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했던 말에서 따왔다. 굴드가 진화종합에서 당신의 역할에 대해 질문했을 때 라이트는 굴드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거기에서 배제되었다네"

그의 영어이름은 서얼이다. 물론 이런 언어유희를 하면 고인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진화의 종합설에서 그는 말 그대로 '서얼'이었다. 그는 전문적인 박물학자도 아니었고, 수학자도 아닌 일종의 서얼이었고, 그의 이론도 종합설에서 묘하게 '서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래는 유용한 링크를 모은 것이다.

Sewall Wright: Darwin's Successor - Evolutionary Theorist

William B. Provine

Sewall Wright and Evolutionary Biology (Science and Its Conceptual Foundations series)

The Origins of Theoretical Population Genetics

William Provine and the Biological Meaning of Genetic Drift

Collected Papers of R.A. Fisher, Relating to Genetics, Evolution, Eugenics and Miscellaneous

Sewall Wright Papers

Michael R. Dietrich

primary sources: e-texts

Where can I get Provine's paper? Show me the paper!
by 취어생 | 2005/10/24 19:29 | 과학과 철학 | 트랙백 | 덧글(1)
2005년 10월 21일
분자생물학과 록펠러 재단
2005년 6월 18일, 모랑쥬의 책을 읽다가,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1930년 이후 왓슨과 크릭의 DNA구조 발견, 그리고 분자생물학의 폭발에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최근 생물학사가들의 큰 관심거리인 것 같습니다. 이 논문은 에비르 암의 논문에 대한 존 푸에르스트의 반론입니다. 에비르 암의 논문을 읽지 않아서 정확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에비르 암은 그의 논문에서 1930년대 록펠러 재단의 지원이 분자생물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며, 이 당시 물리학적 실험방법론이 중요했고, 이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은 물리학자들이었으며, 록펠러 재단은 이러한 실험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그룹에 연구비를 지원해주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에비르 암은 이러한 물리학자들과 록펠러 재단의 개념적/철학적 밑바탕에는 촛점을 맞추지 않고 있으며, 푸에르스트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있어 그러한 개념적/철학적 밑바탕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즉, 1930년대 물리학에 의한 생물학의 식민지화는 단순히 방법론적인 그것이 아니라 개념적/철학적인 그것이었음을 주장하려 하는 것입니다.

에스트버리와 폴링의 예를 들면서 저자는 이처럼 다른 전통에서 출발한 과학자들이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면서 생물학적 개념들에 지대한 관심을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던 연구방법론 (예를 들어 결정학) 을 단순 적용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니담-워딩턴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발생학적 (흔히 전일론적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연구를 중시하던 생물학의 전통이 왜 록펠러의 지원을 받지 못했는지도 개념적/철학적 밑바탕의 차이에서 연유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분자생물학의 발전과정에서 비주류가 되었던 이유는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지만 역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최근의 Integration을 고려하면 정말 재미있는 주제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버날 Bernal같은 인물과 브라이언 굿윈(언젠가 소개했던)도 언급되는데 버날이 매우흥미롭습니다. 니담/워딩턴에 관심을 가졌던 분자생물학자이지만 아마도 방법론적 한계를 인식하고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했던 인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언제 버날에 관해 조사를 해볼까 합니다.

록펠러 재단의 역할에 관해서는 그것이 결정적이지는 않았지만 필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꽤나 중요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모랑쥬의 결론과 비슷합니다.

저자는 1930년대의 분자생물학의 발전과정을 단순히 사회학적 압력만을 고려해서 생각하면 안되며, 그 속에서 각 학문분과들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던 철학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by 취어생 | 2005/10/21 07:55 | 과학과 철학 | 트랙백
2005년 10월 21일
뇌과학이란 무엇일까?
2004년 10월 18일,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의식"이라는 문제를 의식적으로 피합니다. 제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제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아닙니다. 천재들이 할 작업이지 제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뇌과학에 대한 관심도 시들합니다. 한때 인지심리학에 약간 관심이 있었기는 한데 지금은 그것마져도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진화심리학이 조금 땡기는 편입니다만 이것도 지금으로서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냥 제 능력이 되는 한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전공하시는 분들이 보면 웃을지 모르지만. ^^

1. 놀라운 가설: 영혼에 관한 과학적 탐구
프란시스 크릭 지음 과학세대 옮김
한뜻 1996 (1994)

DNA구조를 발견한 크릭의 저서입니다. 상당히 지루하게 읽히는 책이지만 뇌의 생리학적 기능과 뉴런의 기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놓은 교과서 수준의 책으로 읽기에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 크릭의 의식에 대한 탐구의 결정판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참고로 저는 그리 큰 감흥을 받지 못했습니다)

2.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제럴드 에델만 지음 황희숙 옮김
범양사 1998 (1992)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델만의 저서입니다. 이 책이 범양사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여하간 나왔습니다. 에델만은 대단한 물질주의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이란 물질조직의 어떤 특별한 유형의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두뇌의 형태학에 연결된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냥 훓어 보기만 했는데 좋은 입문서가 될겁니다.

3. 지능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다윈의 관점에서 풀어본 뇌의 신비
윌리엄 H. 켈빈 지음 윤소영 옮김
두산동아 1996 (1996)

책 제목 그대로 지능에 대한 관점을 진화적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좋은 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킨스가 대학원 시절 발표한 논문이 뇌신경세포의 사멸을 다위니즘으로 설명해서 기억과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이었습니다. 진화적 관점이 적용되지 않는 곳은 없으며, 뇌과학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4. 브레인 스토리 -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낼까?
수전 그린필드 (지은이), 정병선 (옮긴이), 김종성 (감수)
지호 2004

그린필드는 뇌와 마음에 관한 연구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관점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책은 안 읽어봤습니다. ^^ 여하간 수전 그린필드 이 사람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입니다. 저도 곧 읽을 생각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T_T

5.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은이)
살림터 1993년

이책은 뇌신경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재미이게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과거 뇌신경병 환자들의 존재로 뇌과학은 급속도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유전자 소동을 일으켰던 FoxP2도 그런 선천적 유전병이 있는 뇌신경병 환자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쾌거였습니다. 인간을 대상을 실험을 할 수 없는 이상 뇌신경병 환자들은 일종의 자연적인 실험체가 되는 셈입니다. 물론 이 말이 이들을 도구로 취급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학이나 분자생물학에서 돌연변이가 정상기능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뇌신경병환자들도 그러한 도움을 줍니다.

6. 뇌과학에서 본 기억과 학습
윤영화 지음
학지사 2001

기억과 학습이라는 주제는 심리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이고, 뇌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책이라고 소개되고 있더군요. 최근에 나온 책이고 한국 저자의 책이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7. http://blog.naver.com/netblue.do?Redirect=Log&logNo=40004261577 인간의 뇌와 마음: 무엇이 문제인가? 이정모 선생의 글도 한번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8. 다른 곳은 잘 모르겠고 뇌과학연구센터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뛰어난 연구들을 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로서는 가장 신뢰가 가는 곳은 이정모 교수의 홈페이지입니다. http://cogpsy.skku.ac.kr 이곳에 링크되어 있는 자료실에서 많은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지심리학쪽 접근이긴 하지만 뇌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만큼 도움이 될 겁니다.

9. http://www.laxtha.com/bhbae/study/study.htm 이곳에서 뇌신경과학에 대한 교과서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교과서로 강추하는 책은 "Neuroscience: Exploring the Brain" by Mark F. Bear, Barry W. Connors, Michael A." 입니다. 해부학에서부터 최신 연구까지 풍부한 그림들과 쉬운 어휘로 뇌신경과학의 초석을 닦는 데 최고의 책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의식의 문제와 심리철학 그런거는 제 관심 밖이므로 그런 것까지 다루지는 않습니다)

10. 마음의 비밀 - 비밀언어 시리즈
데이비드 코언 (지은이), 원재길 (옮긴이) 문학동네 2004년

이런 책이 나왔군요. 코언이 "저자 데이비드 코언은 마음을 다루는 두 가지 입장 사이를 유연하게 오갈 것을 독자에게 주문한다. 해부학과 생리학에 근거를 둔 뇌의학 발전을 통해 인간 의식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환원주의. 인간 심리는 개개인의 통찰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주관적 입장. 검증된 것과 검증되지 않는 주장을 두루 제시하며 어느 한쪽의 가치를 강요하거나 맹신하지 말라고 강조한다."라고 했다는 데 균형된 시각을 줄 것 같습니다. 이 책도 좋을 것 같다는 직관이. 음.. -_-


국내의 뇌과학 연구가 (이건 그냥 제 생각입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냥 짐작입니다) 대충 이렇게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이건 상상 시나리오니까 무시하셔도 됩니다.

뇌과학이 미래학문이라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떠돌면서 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다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습니다.

1. 기존 의과대학에서 뇌해부학을 하던 사람들이나, 생물학과에서 신경생물학 (세포수준의)을 하던 사람들도 너도나도 뇌과학을 한다고 떠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해부학이나 신경생물학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것이 막바로 뇌의 작용을 이해하는 뇌과학인 것은 아닙니다.

2. 신경생물학 자체가 상당히 물리학쪽 성격이 강합니다. 신경생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생물물리학회에 속해 있습니다. 이들이 다루는 기계가 패치 클램프나 탐침을 쓰는 그런 기계들이고 뉴런의 작용 자체가 전기와 지접 연관이 되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신경생물학과 신경생리학은 물리학의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헬름홀츠 [Helmholtz, Hermann Ludwig Ferdinand von, 1821.8.31~1894.9.8] 같은 사람이 좋은 예가 되겠죠.

그런고로 현재 국내에서도 물리학자들 중 뇌과학이라는 간판을 걸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이 하는 일은 주로 전기생리학이거나 복잡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3. 전산학쪽에서 접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Neural Network (신경망)이론이 좋은 예고, 인공지능이나 기타 등등 이쪽에서도 뇌과학에 접근하는 분들 많습니다.

4. 심리학자들도 뇌과학 간판을 걸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대 fMRI를 하는 강은주 박사나 여하튼 심리학 쪽 트렌드도 있습니다.

5. 유전학자나 전통적인 생물학자들도 뇌과학을 합니다. 키스트의 신희섭 교수가 대표적인데 이분은 KO mice로 쥐모델을 가지고 유전자를 뺘고 넣고 하면서 연구합니다.

여하간 뇌과학이라는 분아갸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접근하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사실 저는 손 댈 엄두를 못냅니다만 대충 아는데로 써봤습니다. 도움 되셨으면 합니다.

사진은 제가 초강추하는 교과서 .
by 취어생 | 2005/10/21 07:48 | 과학과 철학 | 트랙백
2005년 10월 21일
이것이 토론인가: 과학과 관련된 100분 토론을 보고
2004년 10월 8일, 100분 토론을 보고. 이 당시 러플린 총장이 꽤나 화재였다.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100분토론에서 찬반의견없이 진행하는 토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방청객이 이렇게 많은 의견을 낸 것도 이례적이다. 물론 중요쟁점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일할자리를 마련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환영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정부에 돌리려 하는 것은 권력의 시녀로서의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서울대 공대 학장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말했듯이 수구꼴통이다. 양보다 질이라는 것도 옳은 이야기이고, 기초기술 (부품등)에 투자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양보다 질이 우선이라는 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에 막바로 빗대어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는 차근차근 기초부터 다져온 역사가 없다. 양과 질의 문제는 과학기술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굴러간 이후에나 논의될 문제인 것이다. 핸드폰과 반도체 기술 몇개로 국가가 먹고 산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모델인 것은 아니다. 다양한 기초구조가 건설되지 않은 상황에서 질을 추구하는 것은 기업구조조정식의 발상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질이 안되는 사람들은 도태되라는 것인가. 각자가 능력이 허용되는 범위안에서 일할 곳과 범위를 마련해 주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닌가.

또한 기득권과 비이공계출신들에 의해 집행되는 행정이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학생의 발언에 대해 카이스트가 질이 떨어졌다느니 충대와 뭐가 다르냐느니 하는 발언이 학장이라는 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그럼 서울대는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댁들이 간판떼고 나면 머가 있길래.

그런 무식한 공대 학장에게 또 방청객들은 왜 가만히 있는가. 그렇게 자유로운 발언이 주어졌음에도 기가 찬다는 식의 표정만 짓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게시판에서 분노를 폭발할 열정이 있으면 그런자리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카이스트 대학원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이 서울대 공대 학장의 발언의 핵심을 논파할 생각은 안하고 카이스트가 능력이 뛰어나서 돈을 더 받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카이스트 니네들처럼 행복한 놈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카이스트가 질이 떨어졌구나"라는 식의 발언 앞에, 왜 전체적인 시스템을 보지 않고 우리의 의견을 카이스트 학생만의 의견이라고 보느냐는 당당한 말을 할 수 없는가. 왜 양보다 질이라는 화두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무지한 발상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는가. 기초부품을 만들자면서 양보다 질을 주장하는 그 무식한 공대학장의 논리를 왜 논파하지 않는가. 왜 자신들 학교의 사정을 넘어 전체적인 구조속에서 논의하지 않는가.

결정적으로 대전방송 40주년 기념식이 아니었으면 이따위 토론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는 비극저인 상황을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가. 우리 나라에서 과학기술정책이라는 것과 이공계문제라는 것이 잠시 덮어두고 어르면 해결된다는 조선시대의 계급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음에 왜 분노하지 않는가. 결국 이공계 위기의 논의에 찬반구도가 필요없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를 토론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기술자라는 인식이 이렇게도 뿌리깊다는 것을 도대체 왜 모르는가. 그렇다고 그것을 해결하는 길이 공직으로의 진출과 정계로의 진출뿐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이 유치함을 또 왜모르는가.

과학과 기술은 하나의 문화다. 그것이 문화가 아닌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 현실속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없다.
by 취어생 | 2005/10/21 07:45 | 과학과 철학 | 트랙백
2005년 10월 21일
최종덕 선생님과의 논쟁
2004년 7월경, 이 당시 사이트가 폭파되었다. 이 글은 반박글을 작성할 의도로 저장해 놓았던 최교수님의 글을 되살린 것과 이후 나의 반박이다. 반박이랄 것도 없다. 내 공부가 부족한 것을 자랑하며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우기고 있을 뿐이다. 가끔 생각이 다르기는 하지만 최종덕 교수님은 그래도 공부하는 학자시다. 다른 허접 교수들과는 다르다. 관련 논의는 이곳이곳을 참고하면 된다.

최종덕 교수님의 글

(1) 행위와 행동을 이분하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려는 구도는 의지, 지향, 의도, 희망, 등의 소위 인간적 특성이라는 심적 표현형을 기술하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방식은 행위와 행동 사이의 넘지 못할 구획이 존재함을 전제해야 한다. (2) 어떤 이는 그러한 강건한 구획의 존재를 굳이 전제하지 않더라도 제한적(속박적constrained) 행동과 지향적 행위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3) 또한 어떤 이는 그런 구획이 애초부터 없었으며 따라서 행동과 행위는 연속적인 표현형의 일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뇌는 분명히 적응기관이지만, 마음은 적응기관이 아니라 부수작용 혹은 부산물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a) 그런 관점을 취하는 그룹 중에서 어떤 이는 마음이 부수작용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뇌로 환원가능한 작용은 아니라고 말한다. (b) 반면에 어떤 이는 마음은 뇌의 부수작용이면서 동시에 뇌로 환원가능한 작용이라고 말한다. (c) 또한 인간의 마음도 적응기관의 뇌처럼 모종의 적응기관의 작용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보통 (b)은 물리주의라고 하며, (a)는 수반론이라고 말한다. (c)은 이런 구도로 짜맞추기가 어렵다.

여기까지는 기존 철학자 혹은 생물철학자들이 흔히 해오던 내용이다. 여기서 (1-3) 과 (a-c)의 구도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은 마음의 문제와 진화의 문제를 잇는 가능성을 새롭게 확보할 수 있다. 우선 (c)에 대하여 언급한다.

마음을 적응적 작용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은 적응기관으로서의 뇌의 작용과 또 다른 선택과정을 통한 다른 방식의 적응성으로서 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럴 경우 뇌의 작용기제와 마음의 작용기제는 결코 공분모 되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로 간의 환원성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이럴 경우 행동과 행위는 차원이 다르며 행위는 행동으로 환원하여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 혹은 모자이크 방식으로만 적응이 이루어진다는 모자이크 적응이론에 해당한다. 모자이크 적응이론은 오늘날 가장 강력한 메이저 이론그룹이다.(c-1)

모자이크 적응이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마음이 적응적 작용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마음이 독립적으로 적응된 결과가 아니라 몸 전체의 적응과정의 일환으로 적응된다는 상호적 적응이론이 있다. 예를 들어 다리 보폭의 길이나 눈의 배치, 앞뒤 다리 간의 거리, 치아의 배열구조 등에 따라 행동 적응이 제한적으로 성립될 것이며, 동시에 그런 행동적 제한에 따라서 그 동물의 뇌의 구조 및 신체의 형태가 발달할 것이다. 이 경우 선택적응과 형태발달은 서로 상호적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경우 행위의 방식은 행동의 방식에 의존적이다. 다시 말해서 행동과 행위는 연속적 발달과정에 있다는 뜻이 된다.(c-2)

그러나 근본적으로 마음을 적응 작용이라고 보는 관점은 결정적으로 그 논거가 매우 취약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은 국소화된 신체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용자의 적응이론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난무하다. 그 예가 바로 진화심리학이다. 최근들어 상당한 붐을 이루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적응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소홀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진화심리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적응이론의 필터를 제대로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진화심리학의 기초는 선천적 지향성이나 문화적 반응 등과 같은 모든(강한 경우 - 예외 없이) 심리적 표상들은 전적으로 적응된 결과라고 보는 입장위에 서 있다.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적응의 범위와 주체 그리고 선택의 방향이 논증되어야 한다. 경험적 검증까지는 요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경험적 검증을 마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분명히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임상실험을 하며 그 임상실험 결과를 토대로서 소위 검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검증의 의미는 귀납의 오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귀납 사례의 폭이 적거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선택적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다는 듯이다.
우선 진화심리학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c-2) 방식의 총체적 적응을 인정해야 한다. 개구리가 앞에 놓여진 벌레를 포식하기 위하여 먼저 포식하려는 “준비”(preparing)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준비는 모든 몸동작을 행동으로 유발하게끔 추진한다. 이때 혀의 놀림, 뒷다리의 튕김, 앞다리의 지레대 기능, 눈의 시선, 후각 또는 청각의 인식작용, 체중의 쏠림작용 등등을 총체적으로 작동시킬 것이다. 적응주의자라면 이때의 행위를 유발하는 신체기관의 적응성을 아주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준비하는 준비 과정 역시 적응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때 준비 혹은 준비과정을 나는 지향적 심리구조로 연관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준비는 뇌의 작용을 일으키며, 뇌의 작용은 포식행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준비에서 뇌의 작용으로 이어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인과작용이라고 보는 입장을 나는 부정한다. 인과작용이라고 말할 경우 그들은 각각을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각각 독립적인 적응과정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독립적이고 모자이크 방식의 적응이론 견해는 넌센스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에게 해당되므로, 왠 개구리 이야기냐 하는 볼 멘 소리가 들린다. 나의 논증은 개구리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포식 행동의 “준비”가 바로 인간의 심리작용에 비유하거나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데 있다. 강력하게는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비유라는 표현은 진화론자 혹은 진화철학자들에게는 스스로의 주장을 격하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선경험과학자가 아니라서, 할 수 없이 비유라는 격하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렇게 “준비”가 행동과 함께 적응을 통한 공진화하기 때문에 마음을 적응의 범주로 놓을 수 있다. 다시 정리한다면 진화심리학은 (1)마음의 적응을 논증해야 하며, (2)동시에 모자이크 적응이론을 포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논점을 거치지 않고서 진화심리학을 말하면 말 그대로 그들 심리적 주장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마음을 적응결과라고 보는 입장에 대하여 강력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뇌의 적응이 곧 마음의 적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증은 다음에 하려 한다.

앞선 글에 이어 마음의 적응이 과연 의미인지를 살핀다
우선 나는 마음을 뇌와 분리하여 이원화하여 말한 적이 없음을 밝힌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둘 사이의 환원주의 주장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컴퓨터피씨와 그 부속품의 관계, 세포와 단백질의 관계, 등의 관계는 그것이 환원적인지 아니면 비환원적인지 시비를 따질 수가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보리알 사이의 환원성을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면 그들의 존재범주 혹은 인식범주가 전혀 다른 데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뇌와 마음을 환원이냐 아니냐의 관게로서 따지는 것은 일종의 범주오류에 해당한다.

마음의 적응과 뇌의 적응을 구분하여 말한 것에 대하여 오해가 있을 수 잇다. 마음의 적응과 뇌의 적응을
구분했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이분성을 착종시킨다고 보는 것은 그런 오해의 일종이다.

마음의 적응은 진화론적 인식론을 논의하기 위한 사전 포석일 뿐이다.
먼저 국소성을 갖는 특정 신체 기관이 아닌 활동 혹은 기능만을 갖는 작용자가 진화의 적응 기제에 적용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기존의 적응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반대는 커녕 논의조차 할 필요를 못느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적 인식론은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작용자 자체의 적응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혹은 성선택을 논의하는 구조에서 역시 작용자의 적응을 논의해야 한다. 성선택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진화심리학자들 대부분 그리고 일부의 행동주의 주장자들은 작용자 적응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들의 주장 대부분은 성향과 경향에 관한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성선택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기묘하거나 아니면 변덕이 심하다.성선택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손증식을 위한 mating 적응과정을 말한 것이지만, 실제로 짝을 찾아 가는 과정, (가능한) 짝에게 잘보일려고 하는 과정, 동기, 자극 등은 어떤 국소적인 물리기관의 행동과는 다르다. 최소한 짝짓기 과정은 행동이 아니라 행위에 속할 것이라고 이상하 선생님도 (이 점만은)인정하실거다.
이런 류의 짝짓기 행위 혹은,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경향성들 이런 류의 작용자는 그것이 국소성의 기관이 아니더라도 적응의 적용범위에 든다는 말이다. 작용자의 개념은 기계론적인 작용가지 포함하므로 지난 번에 쓴 "준비"(preparing) 개념으로 작용자를 대신한 것이다. 준비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휘는 굴향성과 다른다. 해바라기의 해굽음은 마치 지향적 행위처럼보이지만 모든 해바라기에 해당하고 어떤 해바라기도 예외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철학자가 말하는 지향적 행위와 다르다. 따라서 내가 말하려는 준비 도 아니다. 굴향성은 적응의 결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적 fitness 차이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준비는 상대적 fitness의 차이가 생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중에 적응된 마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진화론적 기제가 되기때문이다.
"준비"는 적응한다. 뇌가 적응하듯이 말이다. 준비의 적응이 호모사피언스에게는 마음의 진화로 나타난다는 뜻이 나의 기본 입장이다. 그래서 마음의 적응을 이야기 할때 뇌의 진화와 분리하느니, 아니면 환원이 되느니 아니면 이원론이니 하는 논의는 전적으로 범주 오류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준비의 적응은 뇌의 적응을 필요조건으로 하고 있지만 충분조건은 절대로 아니다.
동시에 준비의 적응은 모자이크 적응이 아니다.
뇌 역시 뇌만의 독립적인 적응이 아닐진데 준비의 적응을 확인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마음은 더 말할소냐?
이런 준비로서의 마음이 적응하는 방식을 이해ㅑ하려면 마투라나의 인식과 존재 행동의 삼각대 존재해명 모델에 도움받는 것이 지금가지 나온 이론 중에서 가장 그럴듯 한 것 같다. 준비는 인식주체로서의 뇌의 국소적 존재 및 그 존재가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서의 인식 그리고 대상을 파악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으로서의 행동 이 세 삼각대 자체가 바로 생명존쟁의 이해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아직 이 논의를 전개하가기 위해서는 확증이 미약하다. 현재로서는 효소작용을 근거로 말하고 있지만 아직 논증이 허약한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단순히 관념적으로 보보거나 물리주의적 환원태로 보는 입장에서 벗어나 진화의 적응대상으로 보았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원래 이야기로.

준비는 적응의 과정을 통해서 확대한다. 어떤 종은 지향으로 어떤 종은 마음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은 매우 독특한 적응과정을 보인다.
호모사피언스에서 준비 적응의 독특성은 이성 혹은 종교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이 이성적이냐 종교적이냐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오냐면 인간의 이성과 종교성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의 적응과정의 한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죵교의 이성을 인간만의 독특한 특이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국인간만의 마음을 비환원적 지위로 억지로 행상시키는 일이다. 단지 준비의 적응, 혹은 마음의 적응은 인간 스스로 (1) "나는 이성적이야" (2) "우리 호모사피언스의 정체성은 이성과 종교성에 있어." 등등 처럼 그렇게 느끼고 마치 그것이 사실인냥 뽐내고 자랑하고 계발하려는 인식의 차원이 바로 마음의 적응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가설적 자기존재 설정 과정인데 이 점은 당위적 인간 행위를 유발한다. 이것이 나중에 윤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가 전개하려는 진화인식론의 주요 포인트이다. 자세히는 나중에 다시
오늘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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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5일
네트워킹으로서 마음

<재>,<하> 두 분 모두 네트워킹이라는 방식에 동의하였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설명방식으로서만의 동의인가, 아니면 대상 구조 자체의 기술방식까지를 포함한 동의인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밝혀지겠지요.

네트워킹이라는 설명방식은 설명의 포용성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네트워킹 설명방식은 현재의 과학이론 수준에서 볼 때 수사적이거나 이야기식 narrative 설명에 국한되고 마는 우려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은 저의 입장도 네트워킹을 이용한 설명방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트워킹 설명방식의 구조를 잠시 살펴봅시다.

(1) 먼저 자체 내의 되먹임 구조를 갖는 대상 및 현상에 대하여 적용력이 높으며, 설명방식 자체도 되먹임 인식구조를 보여 줍니다. - 철학자들은 존재와 인식을 구분하는 관성이 있어서 전자와 후자를 굳이 구분하려 듭니다만, 저는 그렇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2) 또한 네트워킹 구조는 자기 재생산의 구조를 autopoesis 은연 중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3) 나아가 네트워킹 구조는 자기 구조 자체 내의 자기조직성 외에 타자와의 내적 상호성 (external, but is seeming as internal)을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재>께서 말한 "서로간의 위계적 네트워킹“ 경험적 차원을 다른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위계성이란 hierarchy 결국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위계성이라는 표현 대신에 중층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만 -
다시 말해서 자기와 타자, 자기 수준과 타자 수준 사이의 상호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독립적 자기가 아니라 상호적 환경론을 수용해야 합니다.
(4) 이렇다 보니 분분들의 합이 곧 전체 이하이거나 이상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기존의 물리적 환원주의와 불일치하게 됩니다. 이 부분이 골치 아픈 문제로 되곤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가능합니다. (i)하나는 강한 환원주의 견해이며, (ii)다른 하나는 현재의 기술방식descriptive 혹은 과학기술 technique 로 표현만 못할 뿐이지 나중에 가서 결국은 환원이 가능하다는 견해와, (iii)존재 자체의 어쩔 수 없는 비환원 구조를 인식의 기술 환원성으로 descriptive reductionism 결코 대치할 수 없다는 비환원주의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iv)아니면 불가지론의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은 사실 따지고 보면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할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자이지만, (ii) 와 (iv) 둘 사이에서 정착을 못한 채 유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5) 마지막으로 네트워킹 구조는 그 자체로 불완전성 구조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완전성은 구조자체 및 기술방식의 불완전성을 다 포함하며, 괴델적인 의미를 연상하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괴델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불완전성이란 완전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적 수식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채워질 수 있는 잠재 구조의 자체적 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모멘텀을 유지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면 철학자가 그렇게나 고집하고 싶은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의 벽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제 진화론이야기로 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geneticism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진화생물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단지 gene이 설명방식의 전부라는 강한 입장을 반대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뿐이겠지요.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도킨스나 루스나 윌리엄스나 굴드나 르원틴 모두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epigeneticism을 “수정된(완화된) geneticism” 으로 보는가 아니면 “anti-geneticism” 으로 보는가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입니다. 저는 그 차이를 크게 부각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논문 쓰기에는 적당하지만 자연을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아주 비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적응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그룹 중에서 강력한 그룹은 형태론자 그룹일터인데, 그들은 일단 발달론을 중시할 것입니다. 이들 그룹 즉 neoepigeneticism 은 발달 구조론자들과developmental structuralism 발달 구성주의자들로developmental constructionism 대충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이 구분은 Mario Bunge, Foundations of Biophilosophy, 1997 에서 한 것입니다) 나는 후자 즉 발달구성주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입장은 기본적으로 developmental system을 어떻게 기술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야마의 정의를 받아 써보겠습니다.

"The developmental system ... encompasses not just genomes with cellular structures and pprocess, but intra- and interorganismic relations, including relations with members of other species and interactions with the inanimate surround as well". (Oyama, S. , The Ontogeny of Information. Cambridge, 1985, p.123)

기존의 단위 유기체 개념 대신에 발달계 developmental system 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많은 비판과 비난을 가져 왔습니다. 그 비판의 핵심은 발달계 개념은 holism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holism으로만 비판하며 몰고 갈 경우 이는 과학자들에게 아주 치명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2/1 치명적입니다. 또한 반대로 철학자들에게 reductionism으로만 비판하며 몰고 갈 경우도 철학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아주 묘한 감정 대립이지요.

(나에게 말 그대로 그런 상황은 감정적 대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간판을 내리고 계급장 띄어 버리고 다시 잘 본다면 그 차이는 이론의 다양성일뿐이지 위상간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싸움을 하지 말라는 충고는 Sterelny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문 "The Extended Replicator", in Biology and Philosophy 11; 377- 내용 좋음 )
자, 이제 원래 논의였던 마음의 이야기로 들어 갈 수 있을 같습니다.

즉 국소적 유기체의 개념으로가 아니라 발달계로 단위 생명체를 볼 수 있다면 마음의 문제는 많이 풀리게 됩니다. 좀 구체적으로는 CES 분석 설명장치로 접근해 본다는 말입니다. 시스템의 CES 분석이란 composition, environment, and structure Analysis의 약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만 하지요 너무 많이 써서 저도 헷갈립니다. 오늘 쓴 것은 사실 <재>, <하> 그리고 우인 님께 대한 답변이 어느 정도 약간 포함된 것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더 두고 봐야겠죠.

나의 말도 안되는 반박글

마음은 없다.

최종덕 교수님의 논리적 설명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쓰신 글인지 직접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해야만 할 겁니다. 그 노고를 인정하며 전 조금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마음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마음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이유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자들이 논구하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관한 무수한 이론들은 철학자들이 마음이라는 현상에 지나친 무게를 부여하면서 파생된 가짜 논의들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철학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붙잡고 몇백년을 소비했듯이, 인간에게 특이한 "마음"이라는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또 몇백년을 소비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철학자들은 마음에 중대한 위치를 부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로 보입니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마음의 지위를 깍아내리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할 수 있는 일만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동유전학과 신경생리학, 진화심리학의 성과들을 활용해서 마음이론을 만드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반론이니 물리주의니 하는 말은 모두 필요없는 논의라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물리주의외를 전제로 하지 않는 논의들은 과학적 논의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그게 최한기가 말하는 추기측리고 제가 말하는 과학적 소심함입니다.

착한왕님이 마음을 적응기관으로 말할때에는 이미 마음이 몸의 발현현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라고 봅니다. 마음이 정말 기관인가 아닌가는 철학적 문제가 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과학적 문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착한왕님의 문제제기는 과학계에서는 정설이고 단 한가지의 문제만 파생시킬 뿐입니다. 그건 "적응된 마음은 어떤 식으로 프로그래밍되는가?" 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마음은 몸의 발현현상이고 적응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DNA속으로 정보가 코딩되어야 합니다. 이미 이런 문제가 다 전제되어 있는 물음일 뿐이기 때문에 최종덕 교수님의 문제제기는 철학적 문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제가 끼어들 과학적 문제꺼리가 없습니다. 전 마음이 적응인가 아닌가보다 도대체 그 정보들이 어떤식으로 코딩되어 있는가에 더 관심이 많으며 이 문제만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심리학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이 적응이다 아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된 정보들이 도대체 어떻게 코딩되며 또 코딩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겁니다.

또한 네트워킹 설명방식이 서술적인 설명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좀 더 확실한 기반아래 서려고 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마음의 문제가 DNA 정보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래서 분자신경생리학적의 연구결과들을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제에 가져다 써야 합니다. 그래야 서술적 설명방식에서 벗어나 네트워킹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습니다.
by 취어생 | 2005/10/21 07:36 | 과학과 철학 | 트랙백
2005년 10월 21일
인간 생물학적 본성 이해의 기초로서 유전자 코드와 진화 법칙
2005년 10월 20일, 기무라의 다음 논문을 완역한 것이다.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이 글을 널리 퍼뜨려 주시길

인간 생물학적 본성 이해의 기초로서의 유전자 코드와 진화 법칙

모투 기무라, 일본 미쉬마 국가 유전학 연구소


번역: 김우재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데카르트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의식, 경험, 사고등 우리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고려해보았을 때, 개개인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 말해보자면 개개인이란, 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구별시켜주는 거대한 유전자 풀로부터 추출된 무작위적 표본일 뿐이다. 이 유전자 풀에는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하며, 특히 핵산염기배열의 차원에서 이점은 더욱 명확하다. 그러므로 일란썽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에서 유전적으로 동일한 두 개체가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형적 통일성이 존재하며, 따라서 정상범위에서의 주목할 만한 변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물학전 본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인간이 원시스푸의 스스로 자기복제하는 분자들로부터 기원하며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진화와 유전에 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그의 유전자들이 전제하는 범위를 초월할 수 없다.

물리학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생물학은 20세기 초엽 멘델 유전학이 재발견 되고 유전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기 전까기는 나이브한 경험적 영역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 후 지난 20년간 이러한 진보는 분자유전학에서의 엄청난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와 더불어 생명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전례 없던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진보를 통해 우리는 유기체를 형성하는 지령이 문자처럼 사용되는 네가지 염기(ATCG)로 구성된 DNA 혹은 RNA안에 있다는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표현형질의 총합으로서의 인간 개개인은 수정란에 담긴 유전적 지령 (혹은 유전자 정보)의 번역판인 것이다.

비록 수정란이 하나의 성체가 되는 데 필요한 복잡한 화학 반응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아직 존재하지 않고, 고등 식물이나 동물의 염색체의 분자구조가 아직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전물질의 가장 근본적인 면은 이미 해결되었다. 우선 분자차원에서의 유전자의 본성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유전자, 더 정확히는 시스트론(cistron)은 A(알라닌), T(티민), G(구아닌), C(싸이토신)라는 네가지 핵산염기의 문자로 쓰여져 있는 선형적 메시지라고 간주할 수 있다. 유전자가 작동하면 이러한 DNA상의 정보는 RNA로 전사되며 RNA는 T(티민) 대신 U(우라실)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이 DNA와 다르다. 전령RNA의 정보는 20여 종류의 아미노산이 연결되어 폴리펩타이드로 번역된다. 이렇게 형성된 폴리펩타이드는 접힘과정을 통해 기능을 가진 단백질이 된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효소, 호르몬, 구조물질(머리카락)등이 모두 단백질임을 기억해야 하며 단백질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진다.

이제 세가지 염기로 이루어진 트리플렛(triplet)이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코돈(codon)을 구성한다. 네가지 염기의 트리플렛으로 가능한 조합의 수는 4^3=64 코돈이다. 이들 중, 61개는 20개의 서로다른 아미노산을 지정하고 나머지 3개는 번역과정을 정지하라는 명령의 역할을 수행한다. 64종류의 모든 코돈이 해독되었고, 이는 현대 생물학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다.

유전자 돌연변이는 DNA 메시지 상에서의 변화이며, 두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하나의 염기가 다른 염기로 교체되는 것 (2) 삭제나 첨가와 같이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유전자 돌연변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자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오타가 있으면 문장 자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비록 해로운 효과가 각 돌연변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많은 양의 돌연변이는 개체의 생존과 생식(적합도를 말한다)에 안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만약 단백질의 중요한 부위에 변화를 주는 돌연변이가 일어난다면 그 영향은 매우 클 것이다. 반면에 DNA상의 변화가 둥글둥글한 단백질의 표면과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아미노산 부위에서 일어난다면 적합도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특히, 돌연변이가 동의적(synonymous), 혹은 휴지된(silent) 것이이서 DNA상의 변화가 같은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것이라면 해로운 효과는 최소화되고 자연선택은 이러한 돌연변이 유전자와 정상 유전자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러한 돌연변이는 선택적으로 중립적이다.

돌연변이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원인임과 동시에 정상범위에서의 변이가 나타나는 원인이기도 한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표현형상에서의 변이는 유전자와 환경의 공동합작물이며, 대부분의 경우 단 하나의 돌연변이가 집단에 미치는 영향을 구분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해로우며 생물 조직의 질서를 향상시키기보다는 저하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은 열역학의 제2법칙과 일치한다. 돌연변이가 인류 집단의 건강에 매우 해로운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유전학자 뮬러가 "돌연변이의 짐(load of mutation)"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소개하기 전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돌연변이가 일어난 대립유전자가 한종에 속하는 개체의 생존과 생식에 유리할 확률은 상당히 낮고, 이마저도 양성선택(positive natural selection)의 도움이 없다면 한 종의 집단내에 고착화되기 힘들 것이다.

비록 그처럼 유리한 돌연변이의 발생이 드문일일지라도 생명이 기원한 이래로 엄청난 시간이 흘렀고, 셀수 없는 개체들이 탄생했을 것임으로 충분한 숫자의 이로운 돌연변이가 몇몇 계대에서 축적되었을 것이며, 우리와 같이 복잡한 종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생물학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표현형들의 의미를 이와 같이 다윈의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을 기본적인 규칙으로 사용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사실로서의 진화가 몇몇 종교적 신념에 의해 거부되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진화라는 용어는 생물학 이외의 영역에서조차 역사적 발전을 의미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별의 진화"라던가, "우주의 진화"라는 말은 널리 사용된다. 하지만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를 다른 진화와 구별해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생물학적 진화는 일반적으로 환경에 대한 증가된 적응을 수반한다. 그러한 적응적 변화의 축적을 통해 지구상에 좀더 고등한 형태의 종이 등장할 수 있었다. 고등한 형태라는 말은 좀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좀 더 광범위한 환경을 이용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동시에 우리는 중립적 변화와 같은 퇴보 또한 진화의 역사에서 발생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국 진화란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문학적인 숫자의 형태들이 시도되었고 대부분은 결국 실패했다. 단지 운좋은 소수만이 좋은 유전자의 조합을 부여받았고 동시에 유별나게 호의적인 환경이라는 기회를 통해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그들의 숫자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종들은 아종을 만들고 결국 이러한 아종들은 구별되는 다른 종으로, 과와 속으로 분화된다. 점진적으로, 성공적인 계대는 그렇지 못한 계대보다 확장되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육지를 지배하는 포유류의 조상이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던 2백만년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한 종으로 소급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확연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종은 진화라는 게임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운이 좋았던 종이다. 우리는 게임에서 언제나 항상 이기고 있는 도박사와 같다.

분자진화의 기제를 연구하고 있는 집단유전학자로서 나는 이 강연의 나머지를 내가 가진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관한 관점에 대한 설명으로 할애하고 싶다.

개체로서 우리 각자가 가진 유일성은 대부분 인간 집단에 고유한 유전적 다양성으로부터 기원한다. 유전적 구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불평등하게 태어난다. 최근 큰 집단에서 서로 연관되지 않은 두명의 인간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연구했다. 평균적으로 이 둘은 100만개의 염기만큼 다르다.

내 의견으로는, 포유류 집단에서 발견될 수 있는 분자차원에서의 유전적 다양성의 대부분이 자연선택으로부터 중립적이거나 거의 중립적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돌연변이 유입'과 '무작위적 멸종' 사이의 균형으로 집단내에서 유지된다.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그들은 분자진화가 가진 성격이 매우 일시적인 상태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또한 각각의 다형성이 겨우 몇 백 만년 정도만 유지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의 운명이 지구의 역사속에서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 변이들은 (비록 몇 백만년일지언정) 안정적이고 지속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유전적 다양성은 정적일 수 없고, 결과적으로 보면 무작위적 유전자 표류에 의해 추진되는 엄청난 양의 변화가 존재하며, 유전자내의 염기서열을 광범위하게 변형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돌연변이의 무작위성 뿐만이 아니라, 선택적으로는 동등한, 즉 중립적인 돌연변이의 '무작위적인 고정'이 한 종의 진화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내가 몇년전에 지적한 바 있듯이, 살아있는 화석으로서의 각각의 유전자는 염기의 교체라는 방법을 통해 좀더 나은 다른 유전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전정보를 간직하고 있는 거대분자들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게 된다.

진화유전학에서 최근까지도 신다윈주의의 관점이 우세했다. 이들에 따르면 선택적으로 중립적인 유전자는 만일 존재했다 하더라도 매우 드물며, 진화의 역사에서 종내에 축적된 대부분의 돌연변이 유전자는 선택에서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자 차원에서의 진화 연구는 그러한 관점이 분자 수준에서는 매우 의심스럽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선택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거의 중립적인 돌연변이의 무작위적인 고정이 진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돌연변이압(mutational pressure)이 진화적 변화의 중요한 원인임이 밝혀졌다. 즉, 하나의 특징(character)이 자연선택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감추어질때마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 표류에 의해 집단내에 축적되기 시작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퇴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매우 좋은 예가 바로 비타민C 유전자에서 발견되었다. 인간에게는 아스코빅산을 만드는 유전자가 없다. 킹과 쥬크는 이러한 비타민C 유전자의 소실이 중립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했다. 그들에 따르면, 비타민C를 만드는 유전자는 육상 척추동물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해서 원숭이와, 기니아 피그, 과일 박쥐, 몇몇 연작류에서는 이러한 능력이 퇴화되어 있다. 이러한 종들은 비타민C가 풍부하게 함유된 음식을 섭취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따라서 비타민C를 만드는 유전자에 발생하는 돌연변이는 중립적이고 이러한 돌연변이는 무작위적 유전자 표류를 통해 종내에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현재 인류에게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현저하게 개선된 환경과 의학의 발전, 가족 계획등은 자연선택을 느슨하게 만들고 이러한 상화에서는 일반적으로 해가되었을 돌연변이들이 중립적으로 변하게 된다. 항생제의 개발로 인한 박테리아 감염에 대한 감수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느슨해진 선택하에서 돌연변이압의 감소에 따른 생물학적 특징들의 퇴화는-정상적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문화적 진화에 기반한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인류 문명에 치명타를 가할지도 모른다.

인간 염색체 반벌은 3.5X10^5 개 정도의 염기쌍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인구를 40억 정도로 잡아본다면 한 종으로서 인류가 가진 염색체 한벌은 2.8X10^19 정도의 염기쌍이 된다. 이 숫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별의 숫자보다 많고 현재까지 인류가 저술한 책의 숫자보다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이 바늘끝에 올라갈 정도의 공간에 압축되어 있으며, 뮬러가 말했듯이 핵산으로서만 염색체 반벌을 논한다면 겨우 4큐빅 마이크론의 공간을 차지할 뿐이다.

한 종으로서의 인류